고작 가로 138.2㎝, 세로 79.2㎝ 크기에 불과했지만 그림 앞에 서는 순간 압도됐다. 굵고 검은 수묵의 붓선은 빗물을 한껏 먹은, 거대한 인왕산 화강암의 웅장한 위용을 보여준다. 듬성듬성 점묘법으로 표현한 곳곳은 비 온 뒤 안개가 걷히면서 살며시 드러나기 시작하는 산의 속살이다. 쏟아진 비가 폭포수로 변해 힘차게 흘러내리면서 무더위 청량감을 더하고, 산 중턱을 여전히 휘감은 흰 구름 떼는 사라짐을 아쉬워한다. 세필로 묘사한 나무와 이파리, 집 등은 굵은 먹선에 대비되며 강약의 조화를 이룬다.

지난달 27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겸재 정선(1676~1759)의 1751년 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다. 비 갤 무렵 인왕산의 여름 풍경을 그린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중국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의 진짜 모습을 그리는(眞景), 사대주의를 넘은 독창적 예술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명작이다.

교과서로만 볼 수 있었던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기증으로 이번에 실물을 드러냈다. 이 회장의 유족은 고인의 뜻에 따라 지난해 4월 무려 2만3000점에 달하는 문화재 등 미술품을 국내 미술관과 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광주 전남 대구미술관 등 각지에 흩어진 이건희 컬렉션 290여 점을 모아 지난 4월 28일부터 오는 8월 28일까지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을 여는데, 인왕제색도는 지난달 말까지 공개됐다.

감탄을 자아내는 건 인왕제색도뿐만이 아니었다.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기리며 불경을 한글로 언해한 ‘석보상절’, 14세기 고려 불화의 걸작 ‘수월관음도’, 영창대군의 친모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경계를 견디며 쓴 금색 글씨의 불경 ‘불설아미타경’, 고려 10~11세기 청동으로 만든 범종 등 그가 모은 방대한 문화재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 회장의 ‘미술품 심부름꾼’ 가나아트·서울옥션 이호재 회장은 작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해외에 있는 국보급 미술품을 찾아 국내로 들여오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이 회장은 ‘국가가 나서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내가 할 역할이 있다’고 말씀하곤 했다. 특히 국내에 거의 전해지는 게 없는 고려불화는 꼭 찾아오라고 했다. 그렇게 애써 들여온 수월관음도 천수관음보살도 등 고려 불화 10여 점이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미술품 경매) 경합 상대가 한국인이면 무리해서 경쟁하지 말라고 했다. 일단 한국으로 들어오면 된다는 뜻이었다. 재산 불리는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애초 목적이 달랐다.”

‘컬렉터’로서 이 회장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전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유출을 우려해 사비를 털어 각종 미술품을 입수, 보존해온 인물이다. 그의 대표 수집품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전 선생은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간송미술관)을 세우고 여기에 수집품을 전시, 보관했다. 이건희 컬렉션전을 보러 간 이번 서울 나들잇길에 마침 간송미술관의 귀한 문도 열려 들렀다. 간송미술관의 이번 전시 주제는 ‘보화수보’. 잘 보존 처리된 간송의 보물을 다시 본다는 뜻이다. 조선인의 얼굴을 한 삼천갑자 동방삭의 모습이 인상적인 단원 김홍도의 ‘낭원투도’, 터질 듯 탱글탱글한 포도알이 생생한 신사임당의 ‘포도’가 압권이었다. 충식(蟲蝕)된 지점을 흰 눈으로 느끼게끔 한 심사정의 ‘삼일포’는 옛 명작이 복원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예술로 재탄생한 듯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는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치열한 노력 덕분에 지금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됐다. 직관할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크지만 바람을 조금만 더 얹는다면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향유의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점이다. 지난달 21일 한미 정상회담 만찬 장소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습 결정되면서 당일 오후 2시30분 이후 이건희 컬렉션전 예매는 모조리 취소당했다. ‘광클’해서 겨우 표를 얻었던 시민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예매 성공에 기뻐하며 교통편과 숙박 예약을 두 달 전 이미 끝냈는데 막상 취소되니 어찌해야 하느냐는 지방민의 사연이 가장 안타까웠다. 지방민은 문화를 즐기는 비용과 시간도 서울 사람보다 배로 들여야 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이 회장의 기증품을 전시할 이른바 ‘이건희 미술관’ 건립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여러 지방도시가 앞다투어 유치전에 뛰어든 것도 문화 향유마저 수도권에 쏠리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지, 결코 지역 이기주의가 아니었음을 정부는 새길 필요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무회의 일성도 “어느 지역에 살든 국민 모두 공정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 아니었던가.

이선정 신문국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