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이맘때쯤 진한 먹구름과 함께 싸락눈이 제법 날렸다. 오랜만에 보는 하얀 풍경에 아이들이 ‘와’하며 운동장으로 달려 나왔지만 금세 그치고 말았다. 아이들은 머쓱해하며 아쉬움 가득한 채로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서 눈이 실종된 지 이미 오래다. 지난 30년간 눈 내린 날이 연평균 4.1일, 최근 5년간은 2.2일에 불과하다. 그것도 땅에 쌓일 만큼의 눈은 거의 손으로 꼽을 만하다.

문득 26년 전, 고향 마산에서의 결혼식이 떠오른다. 1월이었는데, 전날 아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눈 때문에 결혼식을 치르지 못할 뻔했다. 그날 아침, 무릎까지 쌓인 눈으로 인해 차가 다닐 수 없는 상황이라 예복 차림으로 걸어 식장을 향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처가 하객을 실은 버스는 결혼식이 무려 네댓 시간 지난 뒤에 도착했다. 그때 딸 결혼식을 보지 못해 눈시울을 붉힌 장모님 뒤로 육십 평생 이렇게 눈 내린 것은 처음 본다는 장인어른의 말씀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은 부산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뽀드득거리는 길 위의 발자국을 남기는 낭만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혹자는 부산을 눈이 올 수 없도록 신이 설계한 도시라며, 그 이유로 소백산맥이 북쪽의 눈구름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혹은 지리적 위치가 동남쪽 가장자리에 처해 연해주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동풍이 닿지 않는다는 근거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부산이 그 어떤 지역보다도 따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기후환경 문제로 매번 언급되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는 더욱 가속화되는 실정이다.

지난 10년간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직전과 비교해 무려 1.09도가 높아져 기후관측 역사상 가장 뜨거웠으며, 바닷물 평균 기온도 2021년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위기는 점점 우리 앞에 공포스러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작년 유럽 대륙을 집어삼킨 폭염으로 영국은 한낮 기온이 40도를 넘기며 기상관측 360여 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독일은 극심한 가뭄으로 라인강의 수위가 낮아져 최악의 에너지와 물류대란을 겪었다. 이와 달리 파키스탄은 성경에서나 나올 법한 홍수로 전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는 참극이 발생했고, 브라질 나이지리아 등에서도 집중적 폭우로 사망자와 이재민이 속출했다.

게다가 작년 3월,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인 남극고원의 기온이 -11.5도로 -49도인 예년에 비해 무려 40도 가까이 상승했고, 북극도 마찬가지로 30도나 기온이 올라 영상권이 돼버렸다. 극지방의 온도변화로 인해 북쪽의 제트기류가 약해져 찬 공기가 남하하는 ‘음의 북극진동’으로 미국과 일본 등은 최악의 한파와 폭설로 몸살을 앓았다. 이렇게 가파른 기온상승으로 기후의 전체적인 균형이 깨지면서 발생하는 기온 양극화로 인한 재앙은 이제 인류 생존 한계를 위협할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를 비롯한 우리 부산의 미래는 어떠할까?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6차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수준과 유사한 온실가스 배출이 지속될 경우 21세기 후반 남부지방은 아예 겨울이 사라진다고 예측한다. 다시 말해 1년의 절반이 여름이고, 폭염 일수도 한 해의 3분의 1에 달하며, 태풍과 함께 폭우피해도 심각해 동남아와는 다른 불안정한 아열대 기후가 될 것이라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게다가 부산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10년 뒤부터 저지대가 물에 잠겨 해상도시 건설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뉴스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제 부산의 기후위기는 단지 눈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 차원이 아닌 바로 우리 생존 문제와 직결된 것이다.

지난달 시민공원 남문에는 기후위기 시계가 설치됐다. 이는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반으로 지구의 평균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상승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데, 생태계 붕괴 한계치인 이 온도까지는 불과 7년이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간 지구상에서 자행된 인간중심의 오만과 섣부른 탐욕이 부른 결과는 결국 지금 우리의 몫이자 다음 세대에 큰 빚으로 오롯이 떠넘겨졌다. 작년 구글 국내 종합검색어 1위가 여러 사회적 이슈를 제치고 ‘기후변화’가 차지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기후위기와 생태 문제의 대안은 이제 인식전환의 단계가 아닌 곧바로 우리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후위기 시계의 초침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매일 새로운 지형도가 쓰여야 하고/벚꽃이 북상하는 시기와/단풍이 남하하는 속도가 옛날과는 다르다하며/언제부턴가/봄에 찾아왔던 제비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물론 나비도 동화책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그래도 여전히 행복한 듯 웃고 있습니다’. 이십여 년 전 첫 시집에 실었던 졸시‘환경주의보.2’의 한 구절을 새삼 떠올려보며, 부산에서도 눈을 경험할 수 있는 건강한 그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