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최근 민주주의 위기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념(conviction)이 아무런 불편함이나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신념이 아니라 값싼 패션(fashion)에 불과하다.” 그의 일갈은 단지 미국 사회를 향한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형식적 절차로만 유지되고, 신념이 이해관계에 따라 재단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화와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며, 정의·공정·자유 같은 가치를 쉽게 외쳐왔다. 그러나 그 가치가 개인의 이익이나 조직의 안위와 충돌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이가 소신을 접고 ‘패션으로서의 신념’ 뒤에 숨었는가. 편안한 선택, 무난한 침묵, 안전한 중립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진정한 신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의 세계에서 신념은 이미 오래전 ‘진영의 무기’로 변질되었다. 거대 양당을 막론하고, 특정 가치를 내세우던 정치인들이 기득권과 이해관계 앞에서 태도를 바꾸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는 원칙을 말하지만, 막상 불이익이 닥치면 그 원칙은 가장 먼저 폐기된다. 그 결과 정치의 언어는 공허해지고, 신념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오바마가 말한 ‘대가를 치르는 용기’는 한국 정치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연금개혁, 지방소멸, 노동시장 개혁, 부동산 정상화와 같은 구조적 과제들은 표를 잃을 위험이 큰 ‘정치적 독약’이다. 그럼에도 이를 감수하고 나서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국민적 합의’라는 미명 아래 문제를 뒤로 미루고, 개혁의 비용을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정치의 관성은 여전히 이어진다. 결국 그들은 표 계산에 능숙한 정치인은 될지언정, 신념을 실천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이들에게 신념이란 진영 결속을 위한 구호이자,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도구일 뿐이다. 극단적 팬덤 정치 속에서 소신 있는 발언은 곧 ‘배신자’의 낙인으로 이어지고, 용기 있는 정치적 이탈은 ‘생존의 종말’로 단죄된다. 정치가 신념을 잃고 진영의 습관에만 매몰될 때, 민주주의의 토대인 다양성과 포용은 설 자리를 잃는다.

경제 영역에서도 ‘위선적 신념’은 예외가 아니다. 오바마는 기업이 공정성과 다양성을 위해 일정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기업 문화는 여전히 ‘효율’과 ‘이익 극대화’라는 이름으로 불공정한 하청 구조, 비정규직 차별, 거래자 담합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ESG와 윤리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이윤 앞에서 모든 가치가 흔들린다.

높은 교육열로 형성된 엘리트층 역시 공정을 말하면서도 자녀 교육에서는 편법과 정보 독점을 통해 불공정을 재생산한다. 그들의 정의는 자신이 기득권을 획득하는 순간 효력을 잃는다. 성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른 그들은 이제 그 사다리를 걷어차며, 청년 세대에게는 ‘각자도생’의 냉혹한 현실만을 강요한다. 신념을 말하던 세대가 신념의 결과를 회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부정의 함정에 빠진다.

언론 역시 자유롭지 않다. 권력과 자본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광고 수익과 정책 홍보, 소송 위험 앞에서 얼마나 쉽게 타협하는가. ‘진실 보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없는 언론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진실이 불편할수록 언론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현실의 언론은 점점 더 조심스럽고, 점점 더 침묵한다.

시민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 안일함이 ‘헬조선’이라는 자조를 낳았다. 부당함을 목격해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회에서 신념은 뿌리내릴 수 없다. 정치 양극화와 팬덤 정치는 바로 이런 시민의 무관심과 피로감이 낳은 결과다. 우리는 ‘혐오 투표’에는 열정적이지만,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개혁 논의에는 냉소적이다. 그 불편함을 피하려는 선택이 결국 아이들의 세대에 더 큰 사회적 부채로 돌아올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오바마가 말한 ‘시험의 순간’에 서 있다. 신념이 행동이 아닌 언어로만 소비되고,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가치가 만연한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채 계속 ‘패션으로서의 신념’에 머문다면, 우리는 영구적 쇠퇴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오바마의 경고는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외치는 그 가치에 대해, 당신은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고, 신념의 대가인 불편함을 감수할 용기를 갖지 않는다면, 지금의 사회적 갈등과 불신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진정한 신념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편안함이 아니라 불편함으로 증명된다. 그 불편함을 감수할 용기야말로 공동체를 지탱하는 마지막 품격이다.신념을 패션처럼 걸쳤던 시대를 끝내고, 다시 신념을 ‘대가의 언어’로 복원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새로운 민주주의의 품격을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