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 9월 6일의 일이다. 상반기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이어 올들어 두 번째의 천만 관객 영화이며 영화진흥위원회 통합 전산망 기준 역대 박스 오피스 사상 서른 세 번째의 기록이다.
‘천만 관객 영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수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평균 관객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동의한 영화라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많은 매체와 산업 관계자들은 오랫동안 천만 관객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탐구를 해 왔다.
첫째는 이야기의 층위에서의 탐구다. ‘이야기의 진입 장벽이 낮은 영화’가 성공한다는 법칙을 많이들 이야기한다. 캐릭터의 목적이 한 줄로 요약되고, 갈등의 축이 선명하며, 장르적 쾌감이 초반 20분 안에 증명되는 서사 구조가 각광받는다. ‘명량’의 이순신, ‘극한직업’의 형사들, ‘서울의 봄’의 전두광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캐릭터들이다.
동시에 이러한 서사는 세대를 관통한다. 조부모부터 손주까지 3대가 같은 지점에서 서사의 변곡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오랜만에 등장한 한국산 천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예시다.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가 취향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가족의 공통된 이슈가 되어야 천만 관객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둘째는 시의성이다. 천만 영화는 대부분 그 시대가 원하고 있는 정서를 정확하게 건드린다. ‘서울의 봄’이 2023년 겨울에 터진 것, ‘왕과 사는 남자’가 올 봄의 시점에 권력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소구한 것은 정확한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관객은 스크린 앞에서 자기의 시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나아가 그것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절묘한 시기의 선택이 관객들의 소통을 일으키는 것이다.
셋째는 영화산업의 메커니즘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스타 배우의 출연, 개봉 첫 주의 스크린 점유율, 관람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마케팅, 경쟁작을 밀어내는 협상력까지 포함한다. 이 층위는 냉정하게 말해 창작자의 손을 떠난 영역이며 그렇기에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메커니즘은 산업 전체의 건강을 해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만 영화가 등장하면 언제나 그만큼의 논란이 생겨난다. 스크린 독과점을 이야기하고, 대자본을 앞세운 블록버스터들의 폐혜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다.
넷째는 중독성이다. 지금까지 서른 세 편의 천만 영화 중 ‘N차 관람’의 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중 첫 번째 사례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였다. 그 이후, SNS의 발달과 관객의 목소리가 더 높아지는 현상까지 생겨나며 콘텐츠 자체의 중독성이 천만 관객을 만들어낸다는 부분도 주목할 상황이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의들과 이 칼럼에서 다루지 않은 그 모든 ‘천만 관객 영화의 조건’들은 모두 결과론에 기인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천만 관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발생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천만 관객을 예측하고 기획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천만 관객을 예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에 준하는 관객이 들어야만 하는 제작비를 들였다는 ‘호프’는 호와 불호의 치열한 논란 끝에 485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그 외에도 천만을 예상했으나 그 근처에도 가지 못 한 작품들의 예시는 차고 넘친다.
여기서 이 질문을 뒤집어 본다. 천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천만 관객이 들지 않는 영화가 어떻게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가다. 어떤 산업이든 정상권에 위치한 극히 일부의 아이템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강조 삼아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천만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발생하는 것이다.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산업의 어떤 기준으로의 ‘천만 관객 영화’를 무시해야만 300만 관객 영화들이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저변이 마련될 것이다. 한국 영화 산업 안에서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만 관객이 아닌 영화를 많이 만드는 것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