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문자’에서 眞人(진인)은 “천지의 근원에서 노닐고 홀연히 세속 밖에서 노닐며 일 없는 데서 소요한다”고 했는데,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실이다.

진인은 욕망이 꿈틀대는 속세에서 훌쩍 벗어나 있으므로 이 사바세계의 갖가지 문제에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죽간본’에서는 이런 진인을 전혀 상상하고 있지 않다. ‘죽간본’의 노자는 통치의 문제에서 잠시도 눈길을 거두고 있지 않다. 여기서 관심사는 ‘素樸(소박)’이다.

‘문자’에서는 ‘明白太素(명백태소)’라 했다. 太素(태소)는 素(소)를 강조한 말로, “크나큰 본바탕”으로 풀이된다. 왜 태소라 했는가? 인위적인 행위의 산물로 가득한 문명 속에서 태어나 살게 된 사람들이 그 타고난 바탕 자체에 뛰어나고 밝은 기운과 힘이 내재해 있음을 잊어버린 채 오히려 본바탕을 미개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여기며 엉뚱하게 작위를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 태소를 환하게 밝혀야 한다고 했으니, 1-2(30회)의 ‘視素(시소)’와 통한다. 본바탕을 잘 살펴서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본바탕은 저절로 환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도 더할 필요가 없다. 인위가 더해지면 도리어 어두워진다. 그래서 ‘문자’에서도 “억지로 무얼 하지 않음으로써”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야 “소박한 본모습을 되찾는다”는 ‘復樸(복박)’이 이루어지는데, 이 또한 1-2에서 말한 ‘保樸(보박)’과 통하다.

노자의 말을 찬찬히 음미해 보자. 본래 노자는 군주에게, 더 넓게는 통치 계층을 향해 이 말을 하고 있으므로 그 대상은 통치자나 정치가다. 지금의 민주정치와 관련시켜 논할 때도 같은 틀 속에서 읽어야 하는가? 즉 ‘명백태소’나 ‘시소’가 정치에 뜻을 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될까? 당연히 아니다. 주권자인 시민이나 국민 모두에게 해당된다. 아니, 사람으로 태어난 이라면 누구나 ‘크나큰 본바탕’을 타고 났다. 민주주의는 이에 대한 이해와 확신 위에 서 있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민주정치는 정체되거나 후퇴하고 전제정치가 끼어든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