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민 문화예술인 상생 목적
- KNN 주도해 만든 연주 단체
- 2주년 공연서 찬사들어 뿌듯
- 농사·음악에 인생 2막 도전
- 40년 기업인 철학 담아내

큰 키만큼 시원시원했다. 전직 CEO가 문화단체 감투를 쓸 때면, 으레 체면치레나 명목상 대표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운영할 때처럼 발 벗고 나서 문화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회원 증원이 필요하면 지인들을 설득해 가입시키고, 경비가 부족하면 자신의 지갑부터 열었다. 지난달 음악단체 창립 2주년 공연이 끝나자마자 실무진을 소집해 내년 연주회 출연진부터 선곡, 편곡 등을 미리 준비하자고 독려했다.

K프렌즈 공동대표를 맡고있는 고영립 ㈜경일 회장은 “지역민을 위해 최고의 공연을 선사할 수 있다면 인생 2막이 아주 보람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빈 기자

애초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공동)대표’로 모셨다는 한 관계자는 인터뷰 자리에서 “죽었구나 싶다(웃음). 이분 밑에서 제대로 안 하면 다들 집에 가야겠구나는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름 앞에 늘 ‘샐러리맨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는 고영립 ㈜경일(물류회사) 회장은 여전히 현역이다. 2014년 3월 화승그룹 회장직에서 퇴임한 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마을로 들어가 농장을 마련해 귀농했는가 싶더니, 어느새 부산의 유명 레스토랑 엘올리브를 인수(2015년)해 농장에서 기른 40여 종 채소를 공급하느라 새벽부터 밭을 일구는 ‘농사짓는 전직 CEO’가 됐다. 통상적인 농사꾼의 일과라면 해 질 녘에 마무리되겠지만, 이때부터 고 회장은 또 다른 공부에 여념이 없다. 자택 인근 카페에서 매주 열리는 음악회를 찾아 음악을 감상하고, 클래식 강의를 듣는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3년째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K프렌즈’를 정상궤도에 올리려면 본인이 먼저 꿰뚫고 있어야 해서다.

최근 부산 수영구 레스토랑 옆 사무실에서 만난 고 회장은 K프렌즈와의 인연에 대해 “퇴임 후 어떻게 살까 고민하던 시기에 K프렌즈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지역민과 문화예술인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문화상생 프로젝트라는 설립 취지가 마음에 들었다. 부산 경남지역민을 위해 1년에 1번이라도 최고의 공연을 선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면 보람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K프렌즈는 지역 민방인 KNN이 주도해 만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2016년 5월 창단 연주회를 가진 K프렌즈는 60여 회원이 모여 지역 인재들을 후원하고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실험적인 연주를 기획하고 있다. 대학 재계 의료계 법조계 등 다방면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고 회장은 지난달 중순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개최한 K프렌즈 창립 2주년 기념 공연인 ‘스프링콘서트’에 찬사가 쏟아지면서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음악을 전공한 지인이 ‘최근 본 공연 중 가장 멋졌다’고 하더군요.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공연을 못 봐서 아쉽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하는데 어찌나 어깨가 으쓱해지던지, 허허.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올해도 5, 6회의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먼저 오는 23~25일 경남 창원 진주 거제에서 금난새 고문 지휘자 초빙 ‘더 클래식 경남’을 공연하고, 오는 9월에는 김해 문화의전당에서 조수미 콘서트도 올릴 예정이다.

‘농사와 음악’. 40여 년 기업인으로 살아온 고 회장이 인생 후반부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두 분야는 닮은 점이 많다.

“우리 농장은 농약을 쓰지 않아요. 씨앗을 뿌린 뒤 채소가 자라는 과정에서 병충해와 기나긴 싸움을 벌이죠. 판판이 지기도 하지만 공들여 기른 채소를 고객에게 제공하면 삶의 활력이 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음악을 같이 듣고 널리 공유한다면 행복 바이러스가 충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른 새벽, 집 앞마당에 핀 꽃 한 송이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는 고 회장은 지역 곳곳에 향기로운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중이다. 임은정 기자 iej0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