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 모두 일제징용 끌려가
- 日서 태어난지 9개월 때 피폭
- 정부 치료비 명목으로만 도움
- 부산시 첫 지원대책 이끌어내
- BIFF토크콘서트도 출연 예정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 죽으면 그제서야 손을 내밀어 주려나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류병문 부산지부장은 원폭 피해자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류병문(75) 부산지부장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원자폭탄에 피폭됐다. 1946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군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떨어졌을 때다. 경남 합천군에 살던 그의 부모는 당시 일제에 강제징용돼 히로시마로 건너갔다. 그의 부친은 히로시마에서 방공호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됐다. 모친은 방공호 인부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을 했다.

당시 원자폭탄은 그의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삼촌·당숙의 생명을 모두 앗아갔다. 다행히 류 지부장의 부친은 목숨을 건졌다. 원폭이 터지는 걸 보고 인근 도랑 둑에 숨었고, 등에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가 살던 판잣집은 내려앉았다. 2살 많은 형과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였다. 류 지부장은 “당시 아버지가 자전거를 빌려 삼촌의 시신을 찾으러 나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들었다”며 “도로 곳곳에 새까맣게 타버린 시신이 즐비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올해로 3년째 지부장을 맞고 있는 그는 최근 부산시의 원폭피해자 생활비 지원책을 이끌어냈다. 시는 현재 부산지역 원폭 피해자에게 매달 5만 원의 지원금과 협회 운영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시 예산 부서와 시의회를 통과하면 내년부터 부산지역 원폭 피해자에게는 생활지원금이 지급된다. 만약 시의 계획이 성사되면 전국 최초 사례다. 그는 부산시의회 신상해(더불어민주당·사상2) 의원이 ‘부산원폭피해자 지원 조례’를 최근 통과시킬 때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보훈대상으로 인정되지 않는 탓에 국가나 지자체가 지원하는 생활지원금은 사실상 없다. 1992년 당시 노태우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40억 엔을 받아 만든 기금으로 치료 지원비 명목으로 매달 10만 원을 지급하는 게 전부다. 일본 정부는 적십자사를 통해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게 일부 금액을 지급하고 있지만, 모두 치료비 명목이다.

문제는 치료비를 제외하고라도 원폭 피해자가 적잖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해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원폭 피해자(1세대)의 장애비율은 23%로 나타났다. 70세 이상 일반인 평균(17.5%)보다 월등히 높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 비율도 36%로 조사됐다. 70세 이상 일반인 평균은 5.7%다.

류 지부장은 “결혼이나 취업에 불이익을 받을까 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원폭 피해자가 많다”며 “이들은 신체적 고통, 정신적 피해, 노동력 상실, 가정 해체 등의 고통을 겪고 있다. 보훈 대상 지정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지자체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류 지부장은 원폭 피해자 2세대의 현실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오는 9일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리틀보이’(김지곤 감독)의 토크 콘서트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 영화는 원폭 피해자 2세대인 고 김형률 씨의 인생을 담은 작품이다. 김형률 씨는 원폭에 의한 유전병으로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을 앓고 있다고 ‘커밍아웃’했다.

“대부분 원폭 피해자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제에 징용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2·3세까지 피폭 영향이 이어지는 등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대를 잇는 고통에 정부와 사회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김준용 기자 jyki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