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생명의 강 낙동강 수필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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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으로 가는 길

김선규
낙동강에 비친 쪽빛 하늘이 눈부셔 서러움이 복받친다. 시리도록 푸른 강물이 창창한 봄빛을 담아 위로를 건넨다.
황망한 마음으로 창녕에 있는 그의 집에서 나오는 길. 늘 그렇듯 낙동강이 나에게 먼저 다가온다. 굽이치는 낙동강을 가슴 깊이 껴안으며 터벅터벅 걸었다. 고운 물길이 뻐근하게 가슴팍을 두드린다. 애잔한 그리움을 낙동강 물줄기에 사푼 얹는다. 낙동강은 허물 많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뒤를 따른다.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몇 달 전이었다.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 전에 없이 파삭하게 말라 있었다. 훌훌 털고 일어나 낙동강 푸른 물길을 안주삼아 술 한 잔 걸치자고 약속했는데…. 결국,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영정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자 시큰 눈물이 괸다.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한 치의 두려움 없이 앞을 향해 달려가던 역전의 용사였건만, 병마(病魔) 앞에선 속절없이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약하디 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내 평생의 벗인 그는 월남전 파병 부대의 소대장이었다. 우리는 베트남이라는 낯선 이역만리에서 같은 부대원으로서 인연을 맺었다. 그곳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총성이 파고드는 땅. 내일이 없는 전쟁터였다. 우리는 피를 뒤집어쓴 채 참혹한 전쟁의 불구덩이 속을 헤집고 다녔다.
한번은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정글에 수색을 나갔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부대원들과 떨어져 나 혼자만 고립이 됐다. 그 와중에 총알까지 빗겨 맞아, 꼼짝 없이 죽었다는 생각에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야전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토록 감사한 순간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들어보니 내 목숨을 구한 건 소대장이었다. 교리상 바로 위험 지역을 이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의 후미를 치고 들어와 나를 구해냈다.
그의 용기와 전우애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로 나는 패닉 상태에 몰렸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 왔다고 생각하니 매순간 이글대는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서있는 기분이었다. 혼돈 속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또다시 소대장이었다.
“김 상병은 고향이 어디지? 내 고향은 낙동강이 흐르는 경남 창녕이다. 낙동강엔 가봤나?”
그는 낙동강을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곤 기억 속에 담아두었던 낙동강의 풍경과 그곳에서의 경험들을 풀어놓았다.
“비록 내 몸은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터에 와있지만, 마음만은 늘 낙동강에 가있어. 낙동강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항상 나를 품어 주었던 마음속의 고향이지.” 낙동강은 그의 과거이자 현재였다.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함을 주는 곳이자, 소용돌이 같은 전쟁터에서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용기를 덧입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그는 낙동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물고기를 잡던 부모님에 대해 얘기했다. 낙동강을 벗 삼아 지내던 자신의 유년시절의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낙동강을 머릿속에서 아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 낙동강에 함께 가보자고 약속했다. 그와 나 사이에 생긴 낙동강이라는 연결고리가 전장에서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도 끝이 났다. 그는 낙동강의 품으로, 나는 부모님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얼마 후 그를 만나러 창녕으로 내려갔다. 창녕에서 처음 바라본 낙동강은 전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마음을 부드럽게 적셔주었다.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낙동강의 풍경이, 자연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수천 년 긴 세월과 뒷이야기들을 품은 낙동강을 따라 그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전생의 연으로 베트남에서 만났던 이들을 떠올리고, 부산항으로 함께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추모했다. 상처와 아픔이 가득한 마음속으로 낙동강 찬바람이 헤집고 들어왔다. 낙동강 물줄기에 잊고 싶은 기억들을 헹궈냈다. 전쟁이 남긴 생채기가 낙동강 물길을 따라 유유히 흩어졌다.
50년 세월의 강이 흐르는 동안 그와 함께 낙동강 구석구석 1300리 물길을 찾아다녔다.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부터 안동 부용대, 상주 경천대, 부산 을숙도 등을 눈에 새기고, 마음에 새겼다.
일생 동안 낙동강이라는 큰 선물을 곁에 두고 살았던 내 오랜 벗은 자신의 바람대로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누웠다. 그는 낙동강에서 태어나, 낙동강의 넉넉함을 가슴에 품고 살다가, 낙동강으로 돌아갔다.
지금 나는 벗을 향한 그리움을 낙동강에 갈무리하며 걷는다. 조금 이르게 닿든 늦게 닿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길이라면, 나도 장대한 낙동강 물줄기를 가슴에 품고 그처럼 흔들림 없이 걸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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