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 낙동강 수필 공모전 우수상목록으로
내 안의 강
박성희 가끔은 소금쟁이처럼 맴도는 삶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막에 혼자 서 있는 느낌뿐이라면 얼마나 막막할까. 다행히 가슴속에 애틋하게 살아있는 풍경 하나가 지친 어깨를 기대게 해준다.
깊고 푸른 강물이 내안으로 슬며시 흘러들 때면 훌쩍 사문진 나루터를 찾는다. 주변의 경관은 변했어도 도도히 흐르는 물빛은 그대로다.
목에 주먹 같은 혹이 있어 혹부리 영감이라 불리던 사공이 흥얼흥얼 노랫가락을 읊으며 노를 젓는다. 빤히 보이는 곳이지만 물이 깊어 건너편에 볼일이 있을 때면 꼭 이 배를 타야 했다. 나도 가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갈 때가 있었다. 그럴 땐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일찌감치 물길의 묘미를 안셈이다. 강바람에 까딱거리는 나룻배가 조금 무섭긴 했지만 아버지가 큰 손으로 꼭 안아주어서 좋았다. 뱃머리에 기대앉아 욕설을 섞어도 밉지 않은 혹부리 영감님의 구수한 입담에 빠져들곤 했다. 신명이 나면 뱃삯을 감해주기도 하고, 어린 우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전을 쥐어주기도 했던 그는 지금 생각해도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사공이었다.
배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옹기종기 모여 앉은 나룻배 손님들은 흔들리는 배 바닥에 인정을 풀어놓으며 소박한 웃음을 공중에 날려 보냈다. 크고 작은 보따리에서 쏟아져 나온 고부랑이 오이, 지고 오느라 곤죽이 되어버린 삶은 고구마, 샘물에 막 타서 온 미숫가루 한 사발조차 귀한 대접을 받았다. 소박한 사람들이 무람없이 나누는 성찬이었다. 대부분은 오일장에 손수 거둔 소채나 물고기를 팔러 가거나, 생필품을 사러나가는 길이었다. 없이 살아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나룻배와 함께 오롯이 기억나는 얼굴이 있다.
눈이 유난히 빠끔한 아이가 퐁당퐁당 서툰 개구리헤엄을 친다. 강변의 모래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던 영주 아저씨네 막내딸 정숙이다. 우리와는 이웃인데다 동갑내기여서 눈만 뜨면 늘 붙어 다니곤 했던 아이다.
어른들에게 강은 생존의 터전이었지만 우리들에겐 그저 즐거운 놀이터였다. 고운 모래펄에서 두꺼비집을 짓기도 하고, 맨발로 내달리다가 볕에 단 모래에 발바닥을 데기도 했다. 강가의 아이들은 그렇게 놀면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의 이치를 배우곤 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스승인 셈이었다.
자연도 늘 순한 얼굴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여름날 일주일 내내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온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밤잠을 잊고 강물의 수위에 전 신경을 모았다. 무섭게 불어나던 강물은 기어이 임시로 쌓은 제방을 넘어 정숙이네 과수원과, 집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사방이 물 천지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동네 어른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피해를 줄이려고 애를 썼다. 일곱 살이었던 정숙이와 나는 평소와는 다른 부산한 움직임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웃비가 그치고 어른들이 경황이 없는 틈을 타 고무 통을 살그머니 마당에 띄웠다. 내가 먼저 정숙이를 통에 태우고 밀어주었다. 통이 기우뚱거리자 겁을 먹다가는 이내 중심을 잡았다. 어른들 몰래 하는 은밀한 물놀이는 참 재미있었다. 마당 한 바퀴를 돌고나면 또 순번을 바꿔 내가 올라탔다. 우리들 옆으로 빗물 냄새를 맡고 따라 온 물고기들이 펄쩍펄쩍 뛰어 올랐다.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몇 마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고무 통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순식간에 통이 뒤집어지고 누런 강물이 온몸을 덮쳤다.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정숙이가 엉겁결에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소리에 놀란 어른들이 달려오고, 아버지가 내 등을 훑어 물을 토하게 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한동안은 물이 무서워졌다.
강에 기대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로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아무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옹골진 마음으로 재건의 삽을 들고 구슬땀을 흘렸다. 강은 결코 떠날 수 없는 약속의 터 같은 곳이었다.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 안에 있을 때 안온함을 느끼듯이 강가의 사람들은 어떤 얼굴의 강이든지 어르고 달래며 그 곁에 더 깊이 뿌리 내리기를 원한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등 떠밀려 살다보면 본능적으로 유년의 강이 떠오른다.
강물은 때로는 자애로운 모습으로, 때로는 성난 짐승처럼 포효하며 억겁의 이야기들을 품는다. 그렇게 쉼 없이 흘러야, 때로는 회오리치며 속을 뒤집어주어야 내면이 더 풍성해짐을 알기에 말없이 제 길을 간다.
나 역시 뭇 생명들을 보듬어 키우는 어머니의 젖줄 같은 낙동강의 딸이어서 오늘도 더운 숨결로 거친 세파를 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