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한글 자부심'과 '외국어 남용'이 공존하는 세상?

오미래 기자 ofuture@kookje.co.kr  |  입력 : 2023-10-07 07:03:56

  
우리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영어로 된 글자가 적힌 것을 보고서 어색해 하지 않습니다. 막상 우리말로 해석하면 허무맹랑한 뜻일지라도 그렇습니다. 한 번쯤 한글이 적힌 모자나 옷을 착용한 외국인 관광객을 본 적이 있을 텐데요. 오히려 한글이 적힌 옷을 입고 있는 한국인을 보기가 드문 데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부산에 위치한 맥주 가게. ‘맥주받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메뉴가 영어로 표기돼 있다.
설마 한글이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요. 인크루트가 2019년 한글날을 맞아 성인 남녀 3862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설문 조사에서 ‘한글에 자부심을 갖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81.8%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고자 하는 움직임도 꾸준하게 보입니다. 다행히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싱크홀’을 ‘땅꺼짐’으로, ‘스크린도어’를 ‘안전문’으로 순화해 정착한 듯한 긍정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서면에서 볼 수 있는 외국어 간판들. 사진=오미래PD
그러나 실제로 거리를 나서면 여전히 외국어가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번화가 거리의 간판이나 건물 이름만 봐도 한글로만 된 이름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카페나 식당 차림표가 영어로만 된 곳도 있습니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미숫가루를‘ M.S.G.R.’라는 이름으로 판매해 화제가 된 적도 있고요. 서울의 고급 공동주택단지에서는 ‘경로당’을 ‘시니어스 클럽’으로, ‘휴게실’을 ‘헤미시 가든’으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 “영어를 잘 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식의 환상 같은 믿음이 있었죠. 그래서 영어를 잘 하는 것에 대한 동경 이런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영어를 간판이든 평소 말 속에 섞어 쓰는 것이든 그런 식의 것이 고급스러운 상류층의 삶의 표상인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라는 생각이 환상처럼 퍼져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간판도 그런식으로 표현을 해주면 여기가 훨씬 더 고급진 곳이라는 느낌을 줄 거라고 사람들이 서로 믿고 서로 속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근본적인 정서는 사대주의죠.”

어묵을 로마자 ‘AMOOK’으로 표기한 부산 서면의 일본식 술집 간판. 사진=오미래PD
뭐라노 취재진은 부산의 번화가 서면을 찾아 외국어 남용 실태를 살폈습니다. 대체할 단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영어를 한글로 표기한 경우도 있었지만 소주를 로마자 ‘SOJU’로, 어묵을 ‘AMOOK’로 표기하는 등 불필요하게 외국 문자가 표기된 곳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산 명지 특이한 아파트 이름들. 사진=네이버지도 갈무리
외국어·외래어 사용 선호 추세는 공동주택단지 이름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요즘 고급 공동주택단지를 보면 꼭 이름에 외국어나 외래어를 포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산에도 ‘명지영어도시퀸덤1차에디슨타운’, ‘명지영어도시퀸덤1차링컨타운’, ‘명지두산위브포세이돈아파트’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곳들 있습니다. 서울 강남의 한 공동주택단지 전망 쉼터 이름은 ‘플로랄 드 파리’, ‘튈르히‘, ’벨르빌르‘ 등 모두 프랑스어인데요. 이제는 영어가 너무 많아지자 다른 외국어로 고급진 느낌을 내고 싶었던 걸까요.

언어 사대주의적 면모는 공적 영역으로까지 번진 듯합니다. 4년 전 강원도 철원군은 ‘제대 군인 교육’을 ‘러닝 밀리터리 반트 재생학교’로, 양구군은 군인 문화 축제를 ‘YG 밀리터리 페스타’로 표현했는데요. 모두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사업이어서 공공기관이 외국어 남용에 앞장선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 지난해 6월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시민공원을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며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 “고급의 정보 소통 이런 측면에서는 자꾸 소외되는 사람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예를들면 모빌리티, 거버넌스, 아카이브 이런 외국어들을 공적인 정책, 제도 이런 데의 용어로 자꾸 사용이 되다 보면은 그런 정책이나 제도를 이해할 수 없는 국민이 분명히 있을 텐데요. 외국어 능력에 따라서 한국인들의 알 권리를 차별하는 일이 공적 영역에서 벌어진다는 거는 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오로지 한국어로만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매일 자연스럽게 읽던 ‘해시태그’를 ‘핵심어표시’로, ‘브이로그’를 ‘영상 일기’로, ‘챌린지’를 ‘도전 잇기’로 바꿔 부르자니 어감이 영, 입에 붙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이미 외국어는 꽤 오래 전부터 우리 삶에 깊이 스며들어 습관처럼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가에는 술자리 벌칙으로 대화 중 영어를 사용하면 술을 한 잔 마시는 놀이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에 전문가는 지금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한글의 입지가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지적합니다.

[ 안태형 동아대 국어문화원 특별연구원 ] “단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성, 성장, 소멸의 단계를 거칩니다. 확대하면 언어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과정에서 많이 사용되는 언어들은 소멸되는 시기가 많이 늦춰져요. 사용하는 것은 계속 살아남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소멸되는 단계를 거치게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추세로 두게 된다면은 많은 우리 어휘들이 외국어나 외래어에 의해서 사라질 확률이 높은 거죠.”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만의 언어 ‘한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듯하다가도 가끔 언어 사대주의적 면모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체할 단어가 없어 한국어처럼 쓰이는 외래어는 어쩔 수 없지만, 무분별한 외국어 남용이라도 줄일 수는 없을까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날이 올까 걱정입니다. 국제신문 뉴스레터 뭐라노가 전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