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6일 칠흑같이 어두운 밤. 경남 양산의 좁은 산길을 승용차 한 대가 올라갑니다. 차는 깊이 1.2m, 폭 2.5m 크기의 구덩이가 움푹 파인 밭 인근에 멈춰 섭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165cm 가량의 40대 여성은 조수석 문을 열고 축 늘어진 60대 남성을 끌어내 구덩이로 밀어 넣습니다. 이후 밭에서 찾은 삽으로 시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흙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런데 여성은 이튿날 사건 현장을 다시 찾습니다. 시신의 왼팔을 꺼내 준비해 간 서류에 지장을 찍은 뒤 다시 덮죠. 영영 연고도 없는 땅속에 묻혀있을 뻔했던 남성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사건 발생 후 열흘 뒤.

뉴스레터 뭐라노의 마스코트 라노입니다. 문서 위조를 위해 암매장한 시신을 꺼내 지장을 찍은 엽기적 행각으로 많은 이들을 경악케 한 ‘의사 암매장 살인사건’. 기억나시나요? 이 사건은 자칫하면 장기미제로 남을 수 있었는데요. 잘 짜인 범죄수사물보다 더 극적인 수사 뒷얘기를 취재해봤습니다.

의사 B 씨의 가족들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 것은 지난 4월 7일. 전날 친구를 만나고 온다던 B 씨는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된 채 귀가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조사하던 실종팀은 수사 초기 강력 범죄 의심점을 발견하고 강력팀에 수사공조를 요청합니다.

부산 금정구 청룡동의 한 주차장. 이곳에서 A 씨는 B 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김태훈·이세영PD

사실 수사 초기부터 유력한 용의자는 A 씨 한 명으로 좁혀졌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나온 여러 정황들이 A 씨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죠. 두 사람은 2013년 주식 커뮤니티를 통해 안면을 틉니다. A 씨는 주변에 자신을 주식 관련 변호사라 사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B 씨가 투자자금을 대면, A 씨가 이를 굴리는 방식으로 동업투자에 나섭니다. 수익률이 좋을 땐 A 씨가 매달 몇백만 원 가량을 B 씨에게 가져다줬죠. 그러나 주식시장이 나빠지면서 B 씨는 원금을 까먹는 상황에 이르고야 맙니다. 이후 둘 사이는 틀어지는데요.

돈 문제로 얼굴을 붉힌 사이라고 해서 용의자로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 경찰이 A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B 씨가 친구를 만난다며 외출에 나선 4월 7일. 아파트 대로변 CCTV에 찍힌 모습을 마지막으로 B 씨의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B 씨가 마지막으로 포착된 지점부터 몇몇 차량의 이동경로를 추적. 그 가운데 유독 의심 가는 차량에서 내린 이가 바로 A 씨였던 것이죠. 특히 당시 A 씨의 차에는 위조번호판이 붙어있었습니다. 더군다나 A씨는 당시 금발의 가발까지 쓰고있었습니다. 당연히 A씨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사건을 담당한 금정경찰서 서무성 형사팀장이 차량에서 내린 모습이 찍힌 CCTV 화면을 A 씨에게 들이밀었을 때조차 “무조건 아니다. 자기는 절대 모르는 일이다”라며 한사코 부인했다는군요.

금정경찰서 형사 2팀 사무실에서 수사팀이 자료를 검토하고 있는 모습.

이러한 상황에서 수사팀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발뺌못할 증거를 가져오는 것. 그나마 공조수사를 하던 실종팀의 추적으로 수사 범위는 양산으로 좁혀진 상태였습니다. 서 팀장이 이끄는 강력 2팀의 탐문수사는 밤낮 가릴 것 없이 이어졌습니다.

수사팀이 A 씨가 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가 오랜 시간 멈춰있었을 자리라고 특정한 세 지점.

그렇게 수사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던 때. 문남일 형사가 일대 도로변 CCTV를 확인하던 도중 깜깜한 밤, A 씨가 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이 한 마을로 진입하기 위해 방향을 꺾는 장면을 포착합니다. 수사팀은 차량 예상 경로 맞은편에 위치한 마을의 CCTV까지 확인해봤더니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던 차량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춰섰습니다. 수사팀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토대로 세 군데 지점을 특정해 탐문수사를 거듭하고 있던 때 2번 지점의 밭에서 산화된 깡통이 서 팀장의 레이더망에 포착됩니다.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붉게 산화된 깡통이 놓여있는 걸 보고 최근에 땅을 팠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산화된 깡통이 발견된 지점. 서무성 금정서 형사팀장

이때 결정적인 마지막 한방. 수사팀은 마을 주민으로부터 ‘이 동네에 얼마 전에 포클레인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요. 그렇게 수소문한 포클레인 기사는 땅을 팠던 위치로 2번 지점을 짚었습니다.

2번 지점의 땅 주인 C 씨는 수사팀의 연락을 처음 받고는 “나무를 심기 위해 땅을 팠다, 모종의 연유로 나무를 심을 수 없어 다시 덮은 것”이라고만 말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XX에 사는 XX년생 A 씨 아시죠?” 서 팀장의 기습 질문에 땅 주인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상대로 둘은 안면이 있는 사이. 나무를 심겠다는 계획 역시 A 씨가 낸 것으로, 구덩이는 B 씨가 실종되기 사흘 전 판 것이죠.

땅을 원상복구 해놓겠다는 조건으로 땅주인의 허락을 맡고 난 뒤 수사팀이 땅을 파고 있는 모습. 수사팀의 추정은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수사팀은 땅을 우선 파봐야겠단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사실 내부에서도 ‘B 씨가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 아니냐. 굳이 땅을 파야 하느냐는 우려도 있었다고. 서 팀장은 ‘땅속 밑에 B 씨가 있다고 100%로 확신할 수 있느냐’는 상관의 물음에 “100%가 어딨습니까. 하지만, 80%는 자신합니다. 설령 아니라도 얼른 확인해야 수사 방향을 새롭게 하니 결국은 파는 게 맞습니다”라고 강력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땅을 파기 시작하자 마침내 B 씨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B 씨의 왼팔 엄지손가락엔 채 지워지지 않은 붉은 인주의 흔적이 남아있었죠. B 씨의 시신을 찾았다고 전하자 A 씨는 그제야 범행 사실을 실토했습니다.

B 씨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 범행 당시 돌이 무성했던 땅은 19일 취재진이 현장을 찾았을 땐 수풀이 무성한 상태였다. 김태훈·이세영PD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A 씨가 투자금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음을 알게 된 B 씨는 돈을 갚지 않으면 이 같은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남편이 이를 알게 되면 이혼을 요구할까 우려했던 A 씨는 B 씨를 헤치기로 결심합니다. B 씨의 생일은 4월 5일. 생일 바로 다음날 A 씨는 케이크를 사 생일을 축하해 준다는 핑계로 B 씨를 불러냅니다. 그러곤 “한 달에 100만~150만 원을 줄 테니 찾아오지 말라” 제의하죠. 하지만 이를 B 씨가 거절하자 금정구 청룡동의 한 주차장에서 미리 준비해 간 도구를 이용해 B 씨의 목을 졸라 숨지게 했습니다.

이튿날(7일) 새벽 B 씨의 아내로부터 이번 사건과 관계된 질문을 받은 A 씨는 의심을 피하고자 범행 이후 하루 만에 시신을 은닉한 장소를 다시 찾습니다. 이번엔 둘 사이 동업관계가 진즉 정리됐음을 증명하는 허위로 작성한 계약서를 준비해 갔죠. 그렇게 시신의 왼팔을 꺼내 지장을 찍어 문서를 위조한 A 씨는 혼자서 구덩이를 절반쯤 덮습니다. 다음날(8일) 땅주인 C 씨에겐 “나무를 심을 수 없게 됐다. 괜히 땅까지 팠는데 미안해서 내가 전날 절반쯤 혼자서 덮어놨다“라고 둘러대며 이날 A 씨와 C 씨는 함께 구덩이를 완전히 메웁니다.

지난 14일 열린 재판에서 재판부는 A 씨에게 검찰 구형(징역 28년)보다 무거운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베스트팀장’ 선정 기념으로 촬영한 단체 사진. 왼쪽부터 구욱형 형사, 박종문 형사, 서무성 팀장, 최성일 형사, 문남일 형사

1994년 경찰복을 입은 서 팀장은 1998년도부터 강력계 형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20여 년이 넘도록 강력계 형사로 일해오며 다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살면서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을 장면들을 숱하게 마주했지만 ‘보람 있는 일’이기에 단 한 번도 직업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고.밤낮없이 수사에 매진한 덕분에 지난 6월 경찰청에서 전국 시·도경찰청 팀장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베스트 팀장’에 서 팀장이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수사팀을 향해 응원을 보냅니다. 그럼 다음주 와이라노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