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라리오노프의 '붉은 광선주의'(1911년 작).

러시아 아방가르드에게 영향을 미친 유럽의 예술운동은 비단 미래파만이 아니었다. 큐비즘과 야수파, 그리고 멀리 보면 세잔느도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에 스승 노릇을 했다. 피카소 또한 이들에게 만만찮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영향은 영향일 뿐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곧 자신들에게 배움을 준 대가들을 뿌리치고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서 살펴본 곤차로파도 이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가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예술들을 카타르시스로 보고, 이를 부정했다. 말하자면, 그냥 정치영역에서 풀지 못한 욕망을 배설하는 공간으로 예술을 취급하는 것에 분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건 예술가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예술관은 그렇게 유별난 건 아니었다. 아방가르드의 예술정신 자체가 삶과 예술의 괴리를 극복하고, 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소외된 예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아방가르드에서 그나마 예술 이후의 예술을 찾아내고자 했던 것처럼, 쓰임새가 아니라, 옹골진 자기 자신의 존재성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예술행위는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선 격렬한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 점을 직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예술가에게 중요한 건 정치적 입장의 선택이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는가 하는 게 예술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 대한 비판이 없을 수 없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주관과 객관의 통합이라는 매개의 과정 없이, 어떤 정치적 입장이라는 주관성이 예술을 지배해 버리는 상황을 반대한 이가 바로 루카치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해 비판적인 차원을 넘어서 비관적이었던 이 철학자는 훗날 스탈린주의의 공식 예술이론가 취급을 받게 되는데, 최근 밝혀지고 있는 여러 자료들에 따르면, 이 또한 많은 오해에서 빚어진 감이 있다.

이 문제를 더 거론하면, 아까운 지면을 낭비할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그치고,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붉은 광선주의'라는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자. 라리오노프는 곤차로파와 더불어 광선주의를 주창하는데, 이건 유럽 예술의 영향을 러시아 민화 형식을 통해 녹여낸 것이다. 러시아 민화라는 건 대체로 '이콘'이라고 불리는 동방정교의 성상화나 '루복'이라는 대중화였다. '루복'은 목판화인데, 대표적인 러시아의 민속예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보는 만화 같은 그림이다.

물론 언뜻 보면, 라리오노프의 그림에서 성상화나 루복의 형식미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그림은 말 그대로 '광선'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추상화이긴 하지만, 미래주의 회화의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러시아를 방문한 마리네티의 강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보기에 다소 정신이 시끄럽지만, 미래주의에 대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인상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선주의라는 말 자체는 마리네티가 촉발시킨 섬광 같은 깨달음에서 연유했다. 사물에 부딪혀 이리 저리 춤을 추는 빛의 약동을 그린 것이 이 그림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라리오노프가 단순하게 빛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라리오노프는 추상성이라 사물성 자체를 드러내기보다, 이런 사물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상'을 조장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노랑과 빨강, 그리고 갈색의 색조를 뒤섞어, 광선의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역동성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이걸 라리오노프와 곤차로파는 "빛의 반사를 통해 발생한 공간 형식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뭐가 도대체 이렇게 어려워'하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A라는 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B라는 거울에서 다시 반사된다. 이때 B에서 반사된 빛의 광선과 A에서 반사된 광선은 서로 교차하면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을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걸 두고 라리오노프는 "예술가의 의지를 고립시킨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리송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리송한 게 아방가르드이다.

문화비평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