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랫가락 읊조림서 문학 정착
- 향가부터 잡가 속요 민요까지
- 민중 모두가 공유한 무형자산
- 한반도 역사와 민낯 고스란히

- 상고시대부터 이어온 신명가락
- 흥·예술 즐기는 민족성 재확인

우리 민족 몸속엔 3·4박자 DNA가 흐른다. 박자와 언어가 만나면 음보(音譜). ‘이 몸이/죽어 죽어/일백 번/곳쳐 죽어’(정몽주 시조 ‘단심가’ 1연). 4박자에 든 충심이 붉디붉다. 배우지 않아도 절로 가락이 나오는 배달 민족. 양반이 자주 짓던 시조만 그런가. ‘뒤뜰에 우는/송아지/뜰 앞에 우는/비둘기//언니 등에/우리 아기/숨소리 곱게/잘도 자지.’ 풀뿌리 민요인 자장가 속 박자는 어떻고. 현대 표어도 4박자로 지으면 또박또박하다. 시위·선거 구호, 트로트 가사도 3·4음보일 때 차지다. 고전 시가에는 박자가 살아 숨 쉰다.

시가(詩歌)는 말로 지어 노래한 시 작품을 말한다. 상고 초기인 고조선 시대에 나타나 현대 시가 출현한 19세기 이전까지 명맥을 이었다. 원시 시가는 음악이 따라붙어 노래로 불렸다. 그랬다가 음악이 빠지면서 노랫가락은 읊조림이 됐다가 이제는 읽는 글로 남았다. 옛 시가는 상고시대 제천의식 때 보인 집단 가무가 원형. 가무와 몸짓으로 내려오다 문자로 정착된,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해온 무형 자산이다.

무가(巫歌)는 고려 시가 중 하나로 주로 무녀가 민간에서 굿을 할 때 불렀다. 왼쪽 박수 두 명이 피리와 장구로 무악을 연주하고 있다. 신윤복 작 ‘무녀신무(巫女神舞).

■ 거북아 거북아

상고시대 노래로 구지가(가락) 공무도하가(고조선) 황조가(고구려 유리왕)가 잘 알려졌다. 학계는 구지가를 가장 이른 옛 노래로 본다.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어라/내어놓지 않으면/구워서 먹으리.’ 대가락국과 오가야 설화가 깃든 구지가를 소리 내 읽어보면, 수로왕과 대양을 건너온 허황옥이 함께 불렀을 사랑가가 들려온다. 경남 김해 하늘을 가끔 지나가는 연분홍 면사포구름이 그때 생겼을까.

믿음이 깨지면 마음에 금이 간다. 아득한 신라 시대에 생긴 균열이 시로 전한다. ‘한참 무성한 잣나무/가을이 되어도 이울지 않으니/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우러르던 그 낯이 변하실 줄이야/달그림자 내린 연못가/흐르는 물결에 모래가 일렁이듯/모습이야 바라보지만/세상 모든 것 여읜 처지여!’ ‘너’는 신라 시대 대신이었다가 승려가 된 신충(信忠). ‘낯이 변한’ 이는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난 신라 34대 효성왕. 왕은 즉위 전 신충에게 “내가 이를 잊으면 이 잣나무와 같으리”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지만 허언이었다. 실망한 신충은 시를 지은 종이를 잣나무에 붙였는데 나무가 이울었다. 효성왕이 그 연유를 알고는 약속을 뒤늦게 실천하자 잣나무가 살아났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신충은 왕이 죽은 뒤 단속사를 짓고 스님이 되었으니 행적과 이름이 같다. 이 시는 2구(9, 10구인 낙구)가 유실돼 10구체 향가(鄕歌) ‘원가(怨歌, 737년)’로 우리 곁에 왔다.

향가는 우리식 표기 체계인 향찰을 사용해, 우리나라에 나타난 첫 정형시다. 신라~고려 중엽이 출현 시기. 성별·나이·신분 구분 없이 작가층이 넓었다. 유교를 좇는 ‘안민가’, 옛날판 흑색선전인 ‘서동요’, 불교 색채 노동가인 ‘풍요’, 지순한 남녀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헌화가’….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향가는 삼국유사에 14편, 균여전 속 보현십원가에 11편이 전한다. 경주 사람 최행귀는 균여 향가를 한역해 중국에 알렸다.

‘덜커덩 방아나 찧어 히얘/거친 밥이나 지어 히얘/아버님 어머님께 받잡고 히야해/남거시든 내 먹으리 히야해 히야해.’ 맞방아(相杵·상저)를 찧어 얻은 쌀로 거친 밥이라도 지어 올리며 부모를 공양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방아를 찧을 때 숨 고르는 소리가 ‘히얘 히야해’이다. 노동요답다. 가난한 가족이 피워올린 효심이 따스하다. 소박하고 간명한 표현이 정겨운 이 가사, 시용향악보에 실린 고려 농촌 속요(俗謠)인 ‘상저가’(작자 미상)이다.

고려 시대에 들면서 향가는 한문학에 밀려 쇠약해지고, 후기 들어 이런 노래가 나타났다. 생활 시였던 속요를 송축(기리고 축하함) 중심인 궁중 음악이 받아 다듬었다. 조선 시대 들어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에 선별돼 실렸다. 이 과정에서 속요에 붙은 꼬리표가 ‘남녀상열지사’. 유교를 받든 조선 사대부는 ‘사리부재(詞俚不載·가사가 속되어 싣지 않는다)’를 내세우며 일부 속요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서 즐거워하는 가사’라고 깔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조선 후기, 야하기로 속요 뺨치는 사설시조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경기체가(景幾體歌) 소악부(小樂府) 무가(巫歌) 참요(讖謠) 역시 고려 시가.

경기체가는 귀족 문학이다. 한림별곡(유원순 등) 상대별곡(권근) 죽계별곡(안축)이 유명하다. 궁중 음악에 맞춰 불렀던 게 악장. 제례 형식과 송축 성격이 강한 한계성으로 전승문학이 못 됐다. 용비어천가 감군은 신도가가 악장. 중국 한나라 악부가 칠언절구 한시로 번역된 게 소악부이다. 이제현 이형상 홍양호 권용정 같은 문인이 번역자다. 무가는 궁중과 민가에서 액막이 의식, 서낭굿을 할 때 불렀던 노래다. 참요는 미래에 나타날 일·인물을 예언하거나 선동하는 내용을 담은 민요다.

■ 얼쑤!

‘박연 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 들어간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은 ‘박연 폭포’를 산수화로 남겼지만, 이북 개성 지역에서는 민요로 명성을 노래해 왔다. 우리 가락과 폭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고려 속요 중 저자가 밝혀진 유일한 작품이 정서(鄭敍) 정과정곡(鄭瓜亭曲). 의종 시절 문인인 정서가 1151년 동래로 유배됐을 때 수영구 망미동 배산 자락에 과정(瓜亭)이란 정자를 짓고 오이(瓜)를 키우며 기다렸건만 왕은 끝내 그를 불러 주지 않았다.

외설 시비에 시달린 속요 중 으뜸은 작자 미상인 ‘쌍화점(雙花·만두 가게)’이다. 이 정도 선정성이 검열을 통과했는데, 제지당한 속요들이 수위가 어땠는지 궁금증을 부른다. ‘쌍화점(雙花店)에 쌍화 사러 가고신댄/회회(回回) 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이 말씀이 이 점(店) 밖에 나명들명/다로러거디러/조그마한 새끼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더러듕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리거디러 다로러/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그 잔 데같이 젊거츠니 없다.’‘만두가게에 만두 사러 갔는데 아랍인 주인이 손목을 잡고 수작을 걸었다, 이 소문이 나게 되면 가게 소년 점원이 퍼뜨렸다고 해야겠다, 나도 자러 가야겠다, 그 잠자리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하더라’는 내용이다. 4장 중 1장인데 나머지 장에선 승려, 우물 용, 술집 주인이 여인 손목을 잡는다. 국력이 다한 고려 말 충렬왕 시절, 향락을 좇는 사회 분위기와 무력한 왕가를 향한 탄식이 읽힌다. 새 나라를 세운 조선이 개국 선양하려고 고려 속요 ‘쌍화점’을 궁중 악극으로 취했을 수도 있겠다.

조선에 이르면 걸출하면서 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는 국민문학인 시조(時調)를 만난다. 한문학 주류 속에서 3장 6구 4음보(45자 안팎) 정형미를 갖추고, 우리말로 한민족 정서와 사상을 이어준, 민족 문학 중 가장 빛나는 별. 영조 때 가객 이세창은 가곡 노랫말을 ‘시절가조(時節歌調)’라 불렀는데 이 말이 ‘시조’로 줄어 통용됐다. 음악성이 없어지고 언어 문학으로 굳어진 예로, 평·엇·사설·연시조로 구분한다.

가사(歌辭)는 운문과 산문 중간 형태로 시조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뤘다. 전기는 사미인곡(정철) 상춘곡(정극인) 면앙정가(송순) 같은 양반 가사, 후기에는 평민 가사가 두드러졌다. 길고 긴 ‘덴동 어미 화전가’는 강인한 조선 여성 삶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문학성이 뛰어나며, 당대 사회상도 잘 드러난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찬송가 창가 신체시 같은 외래 장르와 고전 시가가 맞부딪히는 와중에 잡가가 대중 사랑을 받았다. 12잡가, 휘모리 잡가, 경기소리, 서도소리다. 조선 후기엔 국민 민요 ‘아리랑’이 나타났다.

고전 시가는 한반도 역사요, 우리 민낯이다. 신명 많고 예술을 즐길 줄 아는 민족성을 확인하게 된다. 크고 강한 건 보기에 그럴싸할 뿐 오래 버티지 못한다. 부드러운 힘이 살아남는 시대다. K-팝과 한류는 상고시대부터 이어온 우리 가락이다. 남을 치지 않고 스스로 먹고사는, 동방능력지국(東邦能力之國) 후손이다. 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