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톰 소여의 모험’ 후속 소설
- 아버지 학대 받은 주인공 헉
- 흑인 노예 짐과 뗏목 모험기
- 미시시피강 각종 에피소드
- 19세기 美사회 민낯 보여줘

- 헤밍웨이 등 대작가 찬사 속
- 흑인 비하 논란 등 혹평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대표하는 배경이자 미국에서 제일 긴 강인 미시시피강은 운치 넘치는 도시들을 끼고 흐른다. 하류 루이지애나주 주도이자 항구도시인 배턴루지의 경관이 아름답다.

어릴 적 동화나 만화로 만나 친숙한데 어른이 돼 원전으로 다시 읽는 소설. 제법 많다. 외국 작품으론 ‘걸리버 여행기’ ‘빨강 머리 앤’ ‘돈키호테’ ‘어린 왕자’ ‘모비 딕’…. 여기 트웨인이 1884년 발표한 이 고전이 들어간다. ‘톰 소여의 모험’(1876년) 후속작. 원전을 보면 새삼 머리가 끄덕여진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 정체성이 명료하게 읽히기 때문. 소설 속 19세기 미국은 지금보다는 온화해 보인다. 이 고전을 끝까지 읽으면 그 모습 중 일부는 일그러졌거나 아예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현대 미국인은 이 책에서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할 것이다”를 포함한 세 문구를 앞세운, 익살스러운 저자 경고가 책 머리에 나온다. 영어 사투리를 썼다는 ‘일러두기’를 읽고 나면, 허클베리 핀이 일인칭 화자로 등장한다. 술주정뱅이 백인 아버지 팹에게 학대받으며 야생마처럼 커온 소년 헉(허클베리 핀 애칭), 아내와 딸들이 다른 지역 노예로 팔려 생이별한 채 혼자 사는 장년 흑인 짐이 핵심 주인공이다. 헉은 아버지 매질을 피해 도망친다. 짐은 소유주 미스 왓슨이 자신을 다른 주로 팔려 하자 노예 자유주인 오하이오주를 향해 한밤에 내뺀다.

둘은 외진 섬에서 우연히 만나 뗏목을 마련한다. “자유를 찾아 미시시피강을 타고 남부로 내려가자!” 일차 목적지는 오하이오주로 가는 삼등 증기선이 기착하는 카이로. 하지만 이들은 카이로에 닿지 못하고 지나친다. 그들 앞을 기다리는 건 대모험이다.

크게 보면 서사는 세 덩이다. 헉·짐이 살던 고향을 떠나기 전 상황(전반부), 미시시피강 여행 과정(중반부), 엉뚱하게 도착한 남부 톰 소여 이모 집에서 맞는 해피엔딩(후반부). 헉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험과 자유를 찾아 인디언 마을로 떠나며 얘기가 끝난다.

■ 미국 정체성 명료하게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여행하는 흑인 노예 짐과 헉(오른쪽).

트웨인은 조국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더듬으며, 매우 고심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자신이 미국 정체성을 보여주려 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 그 결과, 거대한 자연-민주주의-흑백·계층 갈등-청교도주의-개척정신-박애-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묵직한 주제를 이 책에서 만난다. 19장에 미시시피강 폭이 2.4㎞나 될 때가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강은 미국을 흐르는 푸른 혈관이고 힘이다. 미국이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덴 이 같은 자연이 내린 축복이 한몫한다. 이런 땅에 산다면 굳이 고등 교육받을 필요가 없겠다. 자연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활기찬 삶, 멋지지 않을까. 헉 생각이 그랬다.

그런 그를 집요하게 제도권으로 잡아끄는 세력이 있다. 대개 지식 계층인 백인이다. 그들이 보기에 헉은 ‘미개인’이다. 미국 소년이라면 가정 보호를 받으며 학교·교회를 다니는 게 정상. 헉을 양자로 삼은 더글러스 부인과 그녀 여동생인 미스 왓슨이 그 범주에 든다. 이를 두고 청교도주의가 낳은, 강제성이 가미된 박애 정신 냄새가 난다고 트웨인은 비꼬았다. 이 마을 대처 판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지도층 모범인사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은 독자는 알겠지만, 헉은 600달러를 소유한 소년 부자다. 대처 판사는 이 돈을 대신 맡아 이자를 불리고 헉의 친부인 팹이 손대지 못하게 지킨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 우리 속담은 부유한 미국을 가리키는 듯하다. 원주민을 밀어내고, 이주민이 신대륙을 힘과 의지로 개척해 부를 발굴한 역사가 이 책에 뚜렷하다. 공공연히 백인 주부와 소년이 흡연을 즐기는 장면, 앙숙인 두 가문이 총을 쏘며 복수 살인극을 이어가는 대목, 군중이 사형(私刑·린치)을 벌이는 광경은 19세기 미국 민낯이다. 허구가 아니라 실제 미국 역사. 총으로 일어난 미국이다. 갈수록 그 후유증이 심해져 선량한 시민이 고통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인디언과 흑인 희생은 아물지 않은 상처이고, 흑백 인종 갈등은 미국이 가진 여전한 어둠이다. 백인 우월주의는 주머니 속 송곳 같이 드러난다.

톰 소여 같은 백인과 노예 흑인은 말투부터 다르다. 전자는 표준어, 후자는 사투리를 쓴다. 흑인 사투리는 중부·남부가 다르다. 한글 번역 땐 전라·충청 사투리를 썼다. 이게 은근히 웃음을 준다. 사투리 문장은 표준 영어 사용이 권장되던 당시 미국에선 파격이었다. 후배 작가들이 이를 이어받아 미국소설 전통이 하나 만들어졌다. 한편에선 흑인을 비하한다는 비난이 나왔고 지금도 불씨로 남았다.

이 소설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아왔다. “하수구 리얼리즘.” 170여 년 전,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 ‘라이프’지가 내린 혹평. 사투리·비어·속어뿐 아니라 문법을 깨뜨리는 주인공들 대화가 난무하고, 흡연·가출·거짓말·도둑질이 밥 먹듯 나오니 교육상 불온서적이라는 비난이 거셌다. 당시 기독교 윤리·가치관을 비웃는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었다.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도서관위원회는 이 책을 장서 목록에서 지웠고, 대부분 학교에서 학생이 봐선 안 된다는 지침을 세웠다. 세월이 훌쩍 흐른 2020년 9월.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통합교육구가 “흑인 비하 표현이 많다”는 일부 학부모 항의를 수용해 이 책을 교과과정에서 뺐다. 이렇게 되자 이 고전을 옹호하는 측이 반발하며 논란이 가열하는 상황이다.

■ 우리 교육 방향도 보여줘

저자는 결코 흑인을 깔보는 작가가 아니다. 그 반대다. 니그로라는 단어를 사용해 빌미를 줬지만,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 트웨인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로 북미에 상륙한 영국 뉴잉글랜드 이민 청교도가 19세기까지 흑인에게 행한 바를 그대로 소설에 옮겼기 때문. 흑백, 나이 차가 많은 헉과 짐은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며 부자지간 같은 도타운 정을 쌓아간다. 인간 신뢰를 확인하는 순간이 큰 감동을 준다.

짐이 타지 농장에 팔려 갇히자 헉은 그를 구하려고 원래 주인인 미스 왓슨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편지가 전달되면 짐은 고향으로 돌아가겠지만, 그가 갈구한 자유는 물거품이 된다. 고민을 거듭하던 헉은 짐이 한 말을 떠올린다. “넌 나에게 하나뿐이자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야.” 소년은 마침내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라고 중얼거린 뒤 그 편지를 박박 찢어버린다.

소설은 비난 속에 명성을 높여갔다. 윌리엄 딘 하우얼스(1837~1920), 조얼 챈들러 해리스(1848~1908) 같은 동시대 작가가 칭찬하고 나섰다. 후대 헤밍웨이·엘리엇·펠프스 같은 대작가도 찬사를 쏟아냈다. 이 고전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과 함께 19세기 미국소설을 대표한다. 소설 후반부에서 작가정신이 더 빛난다. 헉·짐 눈을 빌려 당대 미국에서 빚어진 적나라한 탐욕과 어리석음, 부조리를 날카롭게 고발한다. 익살스러운 필체로 쓰였지만, 당대를 노려보는 눈이 매섭다. 모험소설에 인간과 문명을 성찰하는 시선을 담아낸 필력에 박수가 쏟아진다.

헉과 짐은 고향인 미주리주 세인트 피터스버그를 떠나 중남부 아칸소주 파이크스빌에 3개월여 걸려 도착한다. 이 피터스버그는 소설 속 가상 마을이면서 트웨인이 실제로 어릴 때 자랐던 곳이다. 저자는 4살 때 고향인 아칸소주 플로리다에서 미시시피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도시 한니발(Hannibal)로 이사 왔다. 트웨인 박물관을 포함해 일대가 트웨인 문학 기행지다. 종착지인 파이크스빌은 실제 지명에서 따왔다.

이 고전은 인종 용광로가 돼가는 우리나라에 ‘오래된 미래’ 같다. 다름을 인정하는 두 팔을 더 넓게 벌려야 민주주의가 수용된다는 원리를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G7 국가가 되려 한다. 무엇을 갖춰야 하나. 땅이 좁으니 ‘머리’를 넓힐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은 거대한 영토에서 힘이 나온다. 그 바탕은 유연한 교육 체계다. 헉과 톰 소여가 나란히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우리 교육이 가야 할 길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