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주창
- 지위 달라도 내면가치는 같아
- 평등론과 사뭇 다른 사례 담아

이 책은 ‘개막 시’로 문을 연다. “동서고금/ 별별 꽃들/두루 찾아 모아 오고,/ 별을 헤며 빛을 보태/ 깊고 깊게 농축한 꿀,/ 막 올라/ 대등의 길로/ 찾아가는 길양식.” 책 맨 뒤에 ‘폐막 시’가 있다. “막 내리고/ 불 꺼져,/ 어둡다고 한탄 말라./ 마음이 밝아오니/ 넓은 길 활짝 열려,/ 환상은/ 걷어버리고/ 내가 가리 내 발로.” 석학 조동일 박사(대한민국학술원 회원)가 올해 펴낸 책 ‘대등의 길’은 부제를 ‘인류 역사의 새 지표’로 달았다.

오랜 학문 활동과 삶을 집성한 책 ‘대등의 길’을 펴낸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지식산업사 제공

인문학과 문학 분야 최고 석학으로 꼽히는 저자가 이 책에 쓴 개막 시와 폐막 시 그리고 부제를 접하고 보니, ‘대등의 길’을 찾고 닦고 놓기 위해 조동일 선생이 얼마나 오래 많이 노력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대등의 길’은 새로운 문명론·문화론·예술론·미학을 제시하는 책이다. 핵심은 대등(對等)이다. 평등(平等)과는 말맛이 좀 다르고 내용에도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에 ‘대등’은 “서로 견주어 높고 낮음이나 낫고 못함이 없이 비슷함”으로 풀이돼 있다. 상대적 차이나 서로 다른 조건은 인정하되, 내면 가치나 본질 측면에서는 서로 같음을 말한다. 왕과 농민은 평등하지 않지만 인간으로서 대등하다. 대통령과 택배기사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지만 본질과 내면 가치 측면에서 대등한 존재일 뿐이다.

여성·남성, 어른·아이, 큰 나라·작은 나라, 아프리카 문학·유럽문학, 모두 마찬가지다. 이는 뭇 생명과 자연으로도 이어진다. 생명·자연·지구·우주가 인간 그리고 나와 대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다. 아끼고 보살피며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 대등의 길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밝힌다. “이 책은 연구서적이면서 문학창작이다. 구분을 넘어서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한다. 대등을 말해주는 수많은 사례를 근거로 삼고 대등론을 더욱 분명하게 정립하는 연구작업을 문학창작과 함께 한다.” “이에 관해 복잡하고 난해한 이론을 전개해 머리 아프게 하지 않으니 안심하기 바란다. 차등론을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구닥다리 학문의 치사한 작태와는 아주 다른 신선한 소리를 한다. 차등론을 무효로 만드는 대등론의 구체적인 양상을 실감 나고 흥미롭게 확인하는 ‘대등의 길’로 나아간다.” 문명 대전환을 제안·선언했다.

이렇듯 스케일이 크고 호방·담대하며 새로운 제안을 하는 조동일 박사는 누구인가. 문학 연구가·애호가는 ‘한국문학통사’라는 기념비 같은 저작을 쓴 저자로 많이들 기억할 듯하다. 불문학으로 시작해 국문학자가 됐고, 구비문학·판소리·마당극 등 연구에 큰 성취를 이뤘으며, 이후 동아시아 문학·세계문학 연구로 영역을 거침없이 넓혔다. 수많은 책을 냈는데 그중 ‘동아시아문명론’ ‘창조하는 학문의 길’ ‘대등한 화합’ ‘국문학의 자각 확대’ ‘한일 학문의 역전’ 등도 있다. 유튜브 채널 조동일문화대학의 강연도 잘 알려졌다.

‘대등의 길’에는 저자의 이 같은 이력이 큰 구실을 한다.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불국) 독일 핀란드 아이슬란드 웨일스 아프리카 인도 베트남 한국 등 동서와 고금에 걸친 세계 문학 향연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세계의 주류 문학 탐독에 머무르지 않고 범위를 넓혀 깊이 연구한 저자의 노력은 무척 인상 깊다. ‘대등론’이라는 새로운 철학이 온다. 대등론을 접하고 나면, 과거 철학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