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가 봅니다. 미세하게 창문이 흔들립니다. 어디를 건너가고 있는지 고양이 울음소리가 고요한 새벽 골목을 흔들어댑니다. 사방은 아직 캄캄하고 나는 자리에 그대로 누운 채 심연으로 갈앉는 나를 감지합니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어디 먼 곳을 다녀온 듯, 어디 모르는 곳에 당도해 있는 듯, 아득해진 몸과 마음을 애써 흔들어 깨웁니다.
요즘 들어 시간과 공간은 물론 나 자신도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세상을 뒤집어놓은 역병 탓이 크겠지만 내가 닿아 있는 것에 조금씩 애착을 끊어간다 할까요.
셀폰을 켭니다. 새벽 다섯 시. 간밤에 도착한 몇 개의 메시지가 얌전하게 봉투를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더 건강하세요.’ ‘해피 뉴 이어’ 고만고만한 새해 인사들 속에 ‘지난 해 선생님을 만난 게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덕분에 다시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꽃다발 이모티콘과 함께 날아온 ‘행운’과 ‘설렘’이란 말에 붙들려 한참을 뒤척거립니다.
언젠가 어느 모임에 갔을 때였습니다.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먼저 도착해 책을 읽고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가볍게 수인사를 하고 늦어지는 멤버들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느닷없이 그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오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잠깐 의아했지만 나는 가볍게, 짧은 답을 보냈습니다. “설렘이지요.”
‘설렘’이란 말은 내가 좋아하는 낱말들 중 하나입니다. ‘끌림’ ‘당김’ ‘쏠림’ ‘떨림’ 같은 감성적이고 동적인 어휘들은 자주 주저앉으려는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어둑해지는 생명들을 살려내는 힘이 세지요. ‘어떤 설렘은 참 끈질기다./수천 개의 얼굴로 처처를 살린다.//모르는 이름으로 내 어둠의 바닥에 와 닿은/수많은 당신들에게 마디마디 찬란한 가을을 부친다.’ 최근에 나온 다섯 번째 시집 ‘시인의 말’에서도 나는 그렇게 ‘설렘’이란 말에 올라탔습니다.
어느 해, 수능이 끝나고 난 뒤 그간 힘들었던 수험생들에게 시를 좀 읽어달라는 교장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모교에 갔습니다. 수능이란 큰 관문을 통과한 뒤라 그런지 강당에 모인 학생들의 모습은 많이 지쳐보였습니다. 준비해간 몇 몇 시인들의 시를 함께 읽고 시에서 묻어나오는 것들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선생님께 시는 무엇입니까?” 모두 나를 쳐다봤습니다.
“아, 난감한 질문이군요. 하지만 굳이 답을 만든다면 내게 시는 ‘사랑’입니다. 설렘이 낳은 다양한 색깔. 무엇에든 설레면 말도, 생각도, 새롭게 생겨나지요.” 학생들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싶거나 아니면 나이 든 시인에게서 듣는 ‘설렘’과 ‘사랑’이란 말에 부쩍 관심이 쏠렸을까요.
“이를테면 흔들리며 가는 짐차나 아스팔트를 가르고 꽃을 피우는 풀들, 골목을 굴러다니는 빈 깡통을 만났을 때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게 바로 ‘설렘’이고 ‘사랑’ 아닐까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둘은 정서의 동류항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념이든 맞닥뜨린 순간 어떤 흔들림이 있어야 ‘다음’이 생겨나지 않겠는지요. 그게 아픔이나 분노 기쁨 갈망 절망 등 무엇이 되든. 그들이 오는 때와 장소는 느닷없습니다. 어떻게 알아차리는가에 따라 무늬가 달라지겠지요.”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고, 마음을 모아 손뼉을 쳤고, 밀물처럼 밀려 와 함께 기대고 포개져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끌림을 넘어 서로를 당겼고 어떤 설렘으로 충만했습니다. 문득 그들이 생각납니다. 어디에서건 뜨거운 설렘으로 세상을 조곤조곤 살려내고 있겠지요. 직관과 성찰을 통해 저항과 순응 사이를 오가며 성숙한 삶을 엮어가고 있겠지요. 그러리라 믿습니다.
창밖이 훤해집니다. 여진처럼 다시 바람이 골목을 흔드는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의든 타의든 덜컹거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겠지요. 새해는 열렸고 ‘설렘’은 세상 모든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갈 것입니다. 언제 어느 길 위에서 아프거나 뜨겁거나 차가운 문장들이 덜컹덜컹 와 닿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일어나야지요. 설렐 준비를 해야지요.
권애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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