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달력 배부가 끝났습니다.’ 주거래은행 문에 붙은 문장이 서운하다. 방마다 하나씩 걸리고 남은 달력이 비닐포장에 돌돌 말린 채 천덕꾸러기로 굴러다니던 때가 있었다. 여배우의 한복 사진, 수영복 사진 달력이 유행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 무슨 요일인지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커다란 아라비아 숫자가 또록또록 칸칸이 박힌 큰 달력이 좋다. 우수, 백로 같은 아름다운 이십사절기 시간의 이름이 표시된 달력이 좋다. 말(馬)날이 언제일지 알 수 있도록 십이 간지 동물이 표시된 달력이 좋다. 섣달 손 없는 말날은 우리 집 장 담그는 날이다. 각종 날들이 빼곡히 적힌 엄마의 달력은 가족의 연간계획표였다. 달력은 단순히 약속과 봉급날만 알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숫자로 눈앞에 보여주며, 추상적인 거대한 시간을 분절해서 구체적인 삶의 시간으로 제시한다.

사리, 조금, 물때가 표시된 어촌달력은 우주 공간 속의 소우주 인간을 보여준다. 지구가 위성인 달에 의해 끌려가고 밀려가고 차오르고 내려가는 물의 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인간의 삶에도 환경과 주변에 의해 밀물과 썰물이 오가고, 뜻하지 않은 해일이 닥치고, 기쁨과 슬픔의 수위가 높아지고 낮아진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행성인 지구는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달과 더불어 존재한다. 달과 지구처럼 인간도 인간의 주위를 맴돌며 살아간다. 크고 환한 항성 같은 사람, 작고 어두운 위성 같은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항성 덕분에 빛 속에 살지만 달밤의 낭만을 주는 위성 덕분에 어둠도 아름답다. 지구와 달은 태양에게 빛을 빚지는 빚쟁이 별이다. 대부분의 사람의 삶도 행성, 위성과 같은 처지다. 긍휼과 측은이 인간을 대하는 마음의 바탕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이 지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위치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드물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사람도 빛이 사라지는 순간 행성과 위성처럼 빛을 빚져야 하고, 어느 순간 유성이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하여, 도토리 키 재기 오만과 비굴 금지.

농촌의 종묘사에서 나누어주는 영농달력에는 작물에 따라 각기 다른 씨 뿌릴 때, 모를 옮겨 심을 때, 병충해 방제 시기가 적혀 있다. 영농달력은 인간과 세계의 다름과 다양성을 시간과 연결하는 통찰의 바탕이 된다. 앵두나무는 일찍 꽃 피어 봄이 다 가기 전에 열매가 익는다. 사과나무는 그보다 조금 늦게 꽃 피어 늦가을까지 열매가 익어간다. 자연상태의 식물은 제각기 내장된 시간의 속도에 맞춰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다른 꽃을 앞지르려 하지 않고 다른 꽃의 시간까지 차지하려 경쟁하지 않는다. 식물마다 제각기 다른 파종과 수확의 시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제각기 발아와 성장과 개화와 결실의 속도가 다르다. 영농달력은 같은 나이라고 같은 속도의 성장과 발전을 요구하는 교육제도가 폭력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람의 새싹도 제 내면의 시간의 속도에 맞춰 성장할 권리가 있다. 부디 자연 속 식물을 비닐하우스용 작물로 개량하고 유전자변이 작물로 강제진화시키는 구조를 교육이 인간에게 적용시키지 않기를.

큰 달력을 못 구한 대신 일력을 샀다. 좋은 글귀들이 날마다 한 마디씩 적혀있다. 매일 하루치 공부를 한다면, 오랜 뒤에는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여씨동몽훈의 말씀이다. 일력은 시간을 하루 단위로 생각하게 한다. 돌아보고 싶지 않아도, 날마다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또 새 날을 어떻게 살까. 한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다. 일력은 집을 떠나던 날에 머물러 있다. 그 하루하루 무엇을 했나. 묵은 일력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다가 떼어낸 종이의 두께로 흘려보낸 시간을 가늠한다.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닌 시간이다. 모두 내가 먹어치운 시간이다. 일 년에 한 번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세 번씩 시간을 먹는다. 우리의 삼시 세끼 식사는 시간과 같은 이름을 쓴다. 먹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먹었을까. 아침 점심 저녁 그토록 많은 시간을 먹었건만 먹을수록 시간에 허기진다. 시간강박증이 시간거식증 혹은 시간폭식증 양쪽을 오간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