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잘 내리지 않는 부산이지만 20여 년 전 그해 정월엔 유난히 눈이 많았다. 당시 근무하던 병원은 상당히 고지대에 있는지라 눈길에 서툰 자동차는 아래 큰길에서 기어오르느라 애를 먹었다. 그날 폭설을 뚫고 온 환자가 있었다. 가만있어도 숨이 가쁜 스무 살 청년 J 씨의 질병은 심장 중심부에 큰 결손이 있는 타고난 복합 심장 기형이었다. 조기 수술을 하지 않으면 낫기 어려운 질병인데 어떻게 견뎠는지 물었더니 “모든 게 운명이라 여겼지요” 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참을성이란 때로 병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 보니 아프다는 말을 좀체 하지 않았나 보다. 부모는 아들의 상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몰랐다며 울었다.

상당히 어려운 수술이 예상됐다. 의사에게는 때로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도전의 순간이 있다. 수술실에 무영등이 켜졌다. 패치를 대어 결손을 메우며, 심장을 4개의 방으로 확실하게 분리하는 것이 이 수술의 근간이다. 수술은 정교한 바느질에 비유된다. 체외순환을 가동하고 심장을 정지시킨 후 수선 작업이 시작됐다. 어긋난 부분을 교정하며 한 바늘, 한 바늘 뜰 때마다 중요 부분에 손상을 주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다. 수선을 끝내고 심장을 소생시키는 순간, 표면에 제세동기를 갖다 대고 가벼운 전기 충격을 주었다. 1차, 2차, 3차 …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심장은 좀체 박동하지 않았다. “이런!” 피를 말리는 긴장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수술이 잘못됐나? 빛의 속도가 빠르다지만 생각의 속도는 더 빠른 것 같다. 내 마음이 우주를 수십 번 왔다 갔다 하는듯한데, 어느 순간 심장을 쥐고 있는 손에 꿈틀하는 변화가 감지됐다. “이때다!” 다시 제세동기를 갖다 댔다. 드디어 심장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후유! 수술실에 안도의 한숨 소리, 가득했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모임에서 모 기업체 간부 사원이 된 그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선생님이 제 운명을 바꿔났어요. 일찍 죽을 뻔했던 저를, 수술까지 해서 살려주셨잖아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타고난 질병 탓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그가 마흔 중반에 중견 회사의 간부까지 됐으니 대단한 반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마워!”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도 그만 울컥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순응해야 하는 것인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어떤 어두운 결말을 의미하는가? J 씨와 같은 인생 반전을 의미하는가? 제닝스 브라이언은 “운명은 우연이 아닌 선택이며,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성취하는 것”이라 했다. 우드로 윌슨은 “사람은 운명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이미 그것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운명이란 정해져 있다기보단 주어진 여건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산물’이란 점에 방점을 둔 것 같다.

세월이 더 많이 흘렀다. 오랫동안 심장수술을 집도하며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어떤 운명에 기뻐했다면 어떤 운명에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했다. 아무튼 질병과의 전투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부지런히 습득한 전투력으로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장수가 전장에서 쓰러지듯 의사는 수술실에서 쓰러질 각오를 해야 하며, 최선을 다한 결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의사의 본질이고 운명이라 여겼다. 세월이 주는 연륜에 힘입어, 신산했던 나의 흉부외과 의사의 길에, 차츰 나름의 정신기제가 강화된 셈이다.

작금 우리나라가 큰 혼란에 빠진듯하다. 지난해 섣달 23일 대한의사협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민국 의료의 위기’를 선언했다. 그동안 K방역이 자랑스러운 나라였지만 이제 면역 백신 확보에 실패한 나라로, 코로나 감염병 치료 병상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로 바뀌고 말았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고,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이제 환난의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아 구정도 지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출구가 보이는 듯하다. 전국적으로 코로나 병상이 많이 확보됐고 논란이 많았던 백신 접종도 가능해졌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하나님이 시련을 주면 인간은 그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며,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산물”이라고 했다. 지난 1월 20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낭송된 아만다 고먼의 축시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일부를 인용한다. “민주주의는 때로 지체될 뿐 영구히 패배하지 않는다.” “고뇌하면서 우리는 성장했고, 상처 속에서 희망을 품었으며, 지친 채로 도전했다.” 우리가 새겨들을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도전하고 극복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2021년 신축년(辛丑年)이 나라의 앞날이 밝은 쪽으로 회전하는 뜻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