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는 군기가 있었다. 군기를 잡기 위한 행사 또한 다수의 의대에 존재했다. 교수님과 많은 분들의 노력 아래 사라지긴 했지만, 동아대 의대에도 ‘OT’라고 불리던 행사가 있었다. 막 입학한 신입생 전원과 선배 학생들이 만나는 그 행사에서 모든 참석자는 정장을 갖춰 입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신입생 OT(오리엔테이션)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필자가 갓 새내기가 된 직후,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이맘때에 그 OT에 참석하는 신입생이 지켜야 했던 규정이 기억 난다. 검은 정장을 입어야 했고 착용한 정장과 구두 양말 머리끈 등의 색과 모양이 규정과 다르면 즉시 선배에게 큰소리를 들었다. 걸을 때 또각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도 안 되었다. 그밖에도 OT 장소에서 선배에게 해야 하는 인사의 횟수, 인사를 해야 하는 위치, 선배의 허락 전에는 등받이에서 등 떼고 앉기 등 여러 규정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이를 지키지 못하면 바로 혼이 났다. 그리고 본 행사 후 진행하는 2차에는 참석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장기자랑도 신입생 모두 준비해야 했다. 갑자기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필자는 개그를 좋아해서 개그 장기자랑을 열심히 준비해 즐겁게 선보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많은 친구들은 대학에서, 그리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고 한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의 장기자랑에 열렬한 호응과 박수를 보냈다. 장기자랑을 하는 신입생들이 무안해 할까 봐. 사실 선배들도 갓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단상 위에서 춤을 추고 개그를 해보라고 시키고 싶지는 않아 보였다. 이 OT라는 행사 자체를 그닥 진행하고 싶어 하지 않아 보였다. 이 행사의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대부분이 원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매년 진행된다는 점. 나는 이 점이 OT라는 행사 자체보다 더욱 무서웠다.

어느 해 교수님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OT는 결국 사라졌다. 학생들의 행사였는데 학생들끼리 없앨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의대에서 자교 병원으로 이어지는, 의예과 1학년부터 원로 교수님까지 함께하는 거대한 세계에서 학생은 스스로를 가장 나약한 존재로 느낀다. 고학년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호작용과 눈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누구 하나 쉽사리 나서기 어렵다. 졸업 후 자교 병원에 취직을 하면 직장 상사가 되어있을 사람들이 주위에 수두룩하다. 눈치와 걱정이 앞선다. 모 의대에서는 군기 잡는 행사를 없애기 위해 한 학생이 나섰다가 차후 취직 과정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당했다는 소문이 이곳 학생들 사이에서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있다. 나설 수 있었을까. 누가 보호해줄 수 있을까.

OT가 아직 남아 있다면 어땠을까. 이런 행사는 가만히 두면 무섭게도 알아서 잘 작동한다. 늘 하던 대로 평소처럼. 신입생 때 OT에 대해 불평하던 사람도 선배가 되면 신입생을 혼내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원래도 그닥 심성이 맑지 않은 선배인 나는 새내기들이 한 명씩 정해진 경로와 규칙대로 OT 장소에 입장하는지 지켜보다가 잘못을 저지른 후배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야단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습이 쌓인 역할극에 참여하는, 그런 쉬운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국제신문의 ‘청년의 소리’라는 칼럼을 2년 넘게 쓰면서도 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대와 의료계에 관해서는 글 쓰기를 꺼려왔다. SNS에 올라오는 수많은 관련 소식에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것조차 눈치가 보인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나도 OT 이야기를 꺼내본다. OT가 없어지던 해에 ‘의학과, 의예과 대나무숲’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그 행사를 비판하는 장문의 익명 글이 올라와 전국의 의대생들이 보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학과의 많은 동기와 선배들이 그 글에 ‘좋아요’를 눌러 본인의 뜻을 드러냈다. 그리고 OT를 없애기 위해 앞서주신 교수님들이 있었고, 학생이자 어린 세대인 입장에서 OT에 관해 교수님과 의견을 나누었던 동기 선배들이 있었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함과 믿음을 품고, 투박한 데다 필자인 나의 모순마저 가득한 이 글을 여기에 꺼내어 본다.

동아대 의학과 재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