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천변의 색깔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산책로엔 여전히 마스크를 낀 채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무르익는 봄의 기운을 만끽합니다.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서 봄 속으로 걷다가, 쉬다가 나도 봄물이 듭니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물고기 사냥을 하고 있는 물오리 한 쌍을 만났습니다. 서로 번갈아가며 머리를 물속에 들이박고 꽁지로 허공을 찌르는 모습이 어여뻐 한참을 그들 곁에 잡혀 있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생물의 종마다 다른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다들 거기서 거기인 듯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온몸으로 세상을 들이받는 모습은 인간이나 동식물이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운 털이 다 젖도록 수차례 물속으로 다이빙을 하고서야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물고 나오는 물오리나 꽃눈을 틔우기 위해 제 몸의 구석구석을 찢는 나무와 풀들의 아픔이 다를 리가 있겠는지요.
그렇게 봄 햇살 그득한 물가를 서성거리다 버드나무 가지 위에 앉아있는 흰 새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백로인 것 같습니다. 가늘고 긴 다리를 나뭇가지에 세우고 긴 부리를 쩍 벌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리에서 빠져나와 왜 여기 홀로 머물고 있을까요. 사람들과 차들이 오가는 소리 분주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모형을 만들어 나무에 붙여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벌린 부리를 닫기는커녕 깃털하나 날리지 않고 부신 햇살에도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는 백로는 언제부터 이 자리에 앉아 세상의 온갖 것들을 몸으로 다 받아내며, 풍경의 일부인 듯 꼿꼿하게 저를 견디고 있을까요. 먹이를 찾아 이리 저리 몰려다니며 찧고 까부는 주변의 비둘기 떼완 다릅니다. 한 번 바라봐주지도 않지만 나는 나를 홀리는 저 격조 있는 새를 두고 걸음을 뗄 수가 없어 아예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습니다.
‘장자의 목계’를 생각합니다. 고수가 되기 위해선 주변의 어떤 자극에도 무심해야 합니다. 나무로 깎아놓은 닭처럼 그 어떤 것들에도 끌려다니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기만하고 욕되게 할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고선 자기 속의 화를 다스리기 힘들지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말이 있지만 아예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고수 아니겠는지요.
지인 중에 ‘목계’ 같은 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싸움닭들이 싸움을 걸어와도 말려들거나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들이 지쳐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때까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게 기다려줍니다. 분노하거나 누굴 원망하거나 험담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그 어떤 추한 것들도 그를 물들이거나 흔들지 못합니다. 주변인들은 지극히 겸손하고 내공이 깊은 그분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야, 새!” 갑자기 버드나무 위 새를 쳐다보며 크게 소리를 질러봤습니다. 순간 흰 새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 하는 것 같습니다. 아, 살아있는 새가 맞았습니다. 잠깐이라도 새 아닌 새일 거라 생각했던 나는 기뻤습니다. 새야, 세상의 어떤 소란에도 꿈쩍하지 않는 새야, 네가 고수구나. 나는 언제쯤 나무로 깎아놓은 것처럼 그 어떤 것들에도 흔들리지 않게 될까. 속엣말을 건네 보지만 여전히 흰 새는 자기 자리를 고요히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그만 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에 두 손을 담그고 물속을 들여다봅니다. 낯선 얼굴 하나 흔들리고 있습니다. 너, 누구니?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 거니? 잘 살아 왔다고, 잘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니? 약간의 풍문에도 흔들리고 약간의 자극에도 비틀거리는 너란 이를 어쩌면 좋겠니? 혼자 주절거려보지만 물은 나를 지우고 물길을 만들며, 지네들끼리 시끌시끌 조잘조잘 아래로 흘러갑니다. 아직도 나는 나를 조절하기 힘이 듭니다. 내 식의 명상에 들어 무념무상을 지향해보지만 늘 이런저런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멍 때리기’ 수준도 효과가 있다 하니 언젠가는 속 근육이 튼실해져 그 어떤 것들에도 초연해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이기고 지는 일에 목숨을 건 싸움닭들로 여전히 세상은 시끄럽지만 그저 짐작이나 하며 바보인 듯, 멍청한 듯, 목계처럼 사는 것도 참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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