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본받기’. 최근 박형준 시장을 보좌하는 ‘부산미래혁신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제시한 부산시정의 최대 화두다. 하태경 위원장은 “(시정의) 핵심 비전은 부산을 동북아시아의 싱가포르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본받기는 4·7 보궐선거에서 박 시장과 겨뤘던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후보의 으뜸 공약이기도 했다. 싱가포르를 본받는데 여야가 한목소리를 낸 셈이다.
왜 그럴까.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할 당시 먹고 살 자원은커녕 식수조차 외국에서 사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한 도시국가였다. 그런 나라가 불과 50여년 만에 세계 일류국가로 변신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6만5233달러) 세계 7위, 국가경쟁력 세계 2위, 국가청렴도 세계 5위…. 이뿐인가. 세계은행이 꼽은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 국민 1인당 도시림면적(66㎡)이 세계무역기구 기준(9㎡)의 7배가 넘는 세계 최고 정원도시이기도 하다.
우리의 최대 현안으로 불거진 부동산 문제에 집중하면, 싱가포르 본받기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주택보급률(112.6%)은 우리나라(104.2%)와 비슷하지만, 자가보유율(92.3%)은 우리(56.8%)를 압도한다. 싱가포르는 국민의 86%가 공공주택에 산다. 세계 자본주의 국가 중 공공주택 비중이 가장 높다. 우리와 유사한 서민 임대주택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실수다. 방 4칸짜리 주택이 40%를 넘고, 방 5칸짜리도 전체의 24%를 차지한다. 집값도 싸다. 전용면적 110㎡ 기준으로 평균 3억3000만 원가량이다.
이런 집을 결혼 4년차면 장만한다. 돈 걱정은 안해도 된다. 우리 국민연금과 같은 중앙후생기금(CPF)에서 실질금리 1%대의 저리로 장기대출해주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 조금씩 갚아나가면 된다. 대신 집을 팔 땐 정부에 팔아야 한다. 환매조건부로 공급한 주택이어서다. 따라서 우리처럼 불로소득을 노린 부동산 투기가 없다. 영혼을 끌어모은 ‘영끌대출’을 하지 않아도 된다. 주거 문제가 쉽게 해결되니 생활이 여유로워지고, 일에 활력이 생긴다. 싱가포르가 단기간에 기적 같은 성장을 이룬 동력이다.
어떻게 이런 부동산 정책이 가능할까.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의 탁월한 정치철학이 그 바탕이다. “자가 소유는 시민에게 국가와 미래에 대한 지분을 주는 것이다. ‘집 소유 사회(home-owning society)’를 실현하겠다. 모든 국민이 집을 소유한다면 나라가 더 안정될 것이다.” 그는 주택 소유를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싱가포르 국민에게 일체감을 심어줄 수 있는 화합의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토지수용법을 제정해 토지를 국유화했다. 현재 싱가포르의 국유지 비율은 90%에 이른다. 그 땅에 집을 지어 분양한다. 주택을 싼값에 공급할 수 있는 이유다. 싱가포르는 바다를 매립해 국유지를 계속 확장하고 있다. 이 체제가 그대로 굴러간다면 ‘부동산 투기 없는 싱가포르’는 영속할 것이다.
우리에겐 이런 사회가 불가능할까. 국·공유지가 적은 우리는 싱가포르 같은 부동산 정책 추진이 어렵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국·공유지 비율이 33.4%(2019년 기준)에 불과한 우리로선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33.4%의 국·공유지가 있지 않은가. 국·공유지를 확장하면 저가 주택 공급을 늘려나갈 수 있다. 박 시장도 선거기간 “하수처리시설이나 폐교 등 도심부에 자리잡은 도시기반시설을 활용해 저가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제시한 ‘분양형 기본주택’은 싱가포르처럼 국·공유지에 집을 지어 싼값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현재 이런 제도와 관련한 3건의 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최대 난관은 보수 진영의 부정적 시각이다. “사회주의 방식”이라고 본다. 그런데 싱가포르식 주택 공급을 먼저 시도한 건 보수 진영이었다. 2007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당론으로 채택한 ‘반값 아파트’ 공급 정책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이 주도해 2009년 관련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7년과 2011, 12년 경기도 군포와 서울 서초·강남에서 반값 아파트를 시범분양했다. 당시 홍준표 의원은 “국가가 장기적으로 국·공유지를 비축해 토지가 공공재라는 인식이 일반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정책이든 우파 정책이든 부동산 투기를 잡을 수 있다면 채택해야 한다”고도 했다.
부산을 동북아시아의 싱가포르로 만들려면, 시민을 그 목표로 이끌 수 있는 리더십과 철학이 필요하다. 리콴유는 주거 문제 해결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고,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4·7 재·보선의 민심은 부동산 문제가 갈랐고, 그 민심은 내년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까지 이어질 것이다. 부산미래혁신위원회가 리콴유의 리더십과 철학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