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면서 완전히 소진되어버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서해를 지나가던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만재 흘수선(선체가 물에 잠기는 최대 한계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적된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며 기운 배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그 배에는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고 304명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전남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에서 남쪽으로 약 3.3km. 모호한 좌표입니다. 유가족이 던진 노란 국화만이 그날의 목적지를 알고 바르게 흘러갑니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에 따르면 그곳은 비장소(非場所, non-places)입니다. 비장소는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 즉 장소 아닌 장소를 말하며 인류학적 장소에 상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날의 그 바다는 인류학적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그곳은 탄생과 생명 차원에서 ‘정체성의 장소’, 공간 점유와 상호 교류의 ‘관계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진행형이기에 앎의 지표로서 ‘역사의 장소’가 될 수도 없습니다. 비장소는 환승 장소(공항 라운지, 터미널)이고 스쳐 지나가는 곳(나들목)이며 거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바일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공간입니다.
추모일 즈음, 한 네티즌이 ‘세월호를 추모하지 않겠다’며 온라인 오픈 채팅방을 열었습니다. 익명의 개설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족을 조롱하는 글을 작성해 올렸고 이에 격분한 누리꾼들이 몰려와 항의하는 글을 연속적으로 올리며 논란이 되었습니다. 채팅방 개설자를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까지 올라가며 추모의 경건한 분위기는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유무선 네트워크 속 오픈 채팅방, 그곳은 비장소입니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저서 ‘공간과 장소’에서 장소는 안전을 상징하고 우리는 장소에 애착을 가짐으로써 그 장소는 가치를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진도 앞바다와 오픈 채팅방이 장소 아닌 장소, 비장소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합니다. 여객선은 비장소입니다. 오픈 채팅방도 비장소입니다. 그 두 곳은 비장소였고 그들은 비장소의 통행자들이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객선의 그들은 호명될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채팅방의 그들은 익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객선의 그들에게는 예정된 목적지가 있었고 채팅방의 그들에게는 혐오란 방향타만 있었습니다. 혐오는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사회적 오염원으로 여겨 기피하는 감정입니다. 감정은 사고와 결합되어 있으며 사고는 직감이 아닌 대상과 근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혐오가 앞으로 전진하는 건강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고 소진되는 감정에 불과하다면 다수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비장소-버스 정류장 백화점 교차로 그리고 SNS를 경험합니다. 비장소를 통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증명(신분증 신용카드 바우처 아이디)해야 합니다. 마르크 오제는 비장소를 고독한 개인성 일시성 임시성 찰나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인간성을 놓치기 쉬운 곳, 관계 지속보다는 관계 경험의 장소로 보았습니다.
비장소 중에서 온라인 네트워크는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비중은 더 커질 것입니다. 온라인 네트워크라는 비장소에서 우리는 익명의 무례함과 가상의 일회성을 경계하며 좀 더 주의 깊게 소통해야 합니다.
그날, 여객선의 승객들은 비(非)장소의 통행자들이었습니다. 침몰을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동거차도에서 남쪽으로 약 3.3㎞. 비(悲)장소에 그들이 있습니다. 그곳의 시간은 여전히 현재입니다. 7년을 과거로 흘려보낸 이는 지금의 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