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성지’라는 부산의 자존심이 제대로 상처를 입었다. 부산시가 전국 최초로 ‘민주화 운동 기념 및 정신 계승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도 4년이 지나도록 기본계획조차 수립하지 않아 조례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이 없다 보니 각종 사업도 아예 진행되지 못했다. 그럴 요량이면 대체 조례는 왜 제정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허울뿐인 조례와 법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러니 민주화 정신 계승을 위한 지원 체계가 부실할 수밖에 없다. 민주항쟁 관련자 지원금도 광주 서울 등에 비해 열악하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부마항쟁과 6월 민주항쟁의 주역으로서 갖는 부산시민의 자부심은 여전히 높다. 2017년 당시 부산시의회 박중묵·전진영 의원이 나서서 조례를 제정한 것도 시민의 이런 민주화 투쟁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조례는 부산시장이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 기본계획을 근거로 5년 단위 중·장기 사업을 설정해 ▷희생자 추모 ▷사료 정리 ▷학술·문화 등 체계적인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기본계획 수립은 고사하고 용역에 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2000만 원에 불과한 기본계획 용역 예산을 해마다 담당 부서에서 상정해도 번번히 삭감됐기 때문이라니 개탄스럽다.

부산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이 타 시도는 잰걸음을 보이고 있어 대조적이다. 1, 2년 늦게 조례를 만든 광주와 전남 서울 경기 등이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사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의 ‘서울 민주화운동 스토리 라인’ 개발, 광주시의 ‘광주형 민주화 교육모델’ 개발 등이 눈에 띈다. 또 4개 지자체 모두 민주화 운동 관련자를 대상으로 월 10만 원의 생활지원금과 장례비 1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반면 부산시가 이번 달부터 지급한 부마항쟁 지원금은 월 5만 원에 그쳤고, 대상자도 부마항쟁 관련자 129명 중 6.9%인 단 9명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기본계획이 없으니 지원 예산도 단 1800만 원밖에 책정하지 않아 빚어진 일이다. 광주(1억9000만 원)와 서울(1억1400만 원)의 10% 안팎에 불과한 예산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결국 부산시의 의지 부족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 2년도 아니고 4년 동안이나 용역비 2000만 원을 편성하지 않아 관련 사업을 ‘올 스톱’ 시킨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기본계획 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설치해야 할 ‘민주화운동 기념 및 정신계승위원회’도 1년에 한 차례씩 회의를 열다가 지난해 해체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시장 공백기였다고 핑계 댈 일이 아니다. 실무 공무원들을 탓 하기에 앞서 시정의 리더부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당장 추가경정예산에 용역비를 배정해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업 추진에 나서야 마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