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는 16년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이틀에 한 번 식사를 하고 철 지난 옷을 입는 것에 대해 나는 슬픈 마음이 없을 수 없었지만, 그대는 한결같이 편안하게 여기었다. 그대는 전에 “슬퍼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어요? 마음만 더욱 곤궁해지지요”라고 했다. 내가 부끄러워하며 사과했다. (중략) 내 옷이 그와 같으니, 아내가 입던 옷을 알 만하다. 끝내 굶주림과 추위로 병이 들었고, 병중에도 몹시 추운 날씨에 엷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한 번은 낮에 이불을 쓴 채 옷을 벗고 솜을 넣고 있었는데, 한기에 몸이 편치를 않았다’(정우봉, ‘沈魯崇의 南遷日錄에 나타난 내면고백과 소통의 글쓰기’, 한국한문학연구 제52집, 한국한문학회, 2013, 283쪽).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효전(孝田) 심노숭(沈魯崇·1762~1837)이 유배지 부산 기장에서 거의 매일 썼던 ‘남천일록(南遷日錄)’의 한 대목이다. 1801년 9월 3일의 일기다. 장모가 보내준 편지를 받고 문득 죽은 아내 전주이씨를 떠올리며 썼다. 먼저 떠나보낸 아내와의 추억을 유배지에서 되새기는 마음은 오죽했을까…. 심노숭은 ‘조선 최고의 로맨티시스트’, ‘조선의 맛 칼럼니스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로맨티시스트’란 표현은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이수광 지음, 다산초당 간, 2007) 책 속에 그를 ‘떠난 아내를 미치도록 그리워한 남자’로 묘사했던 데서 비롯된 듯하다. 실제로 심노숭은 죽은 아내를 위해 도망문(悼亡文)을 많이 썼고 이를 묶어 ‘침상집(枕上集)’으로 펴냈다. 또 심노숭은 이른바 ‘조선의 미슐랭 가이드’로 불리는 시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를 집필했다. 38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물 속에 번득이는 음식 품평 내용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심노숭은 총 1965일(5년 5개월)에 이르는 기장의 유배 기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이는 자기 묘사에 솔직하고, 작은 사실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독특한 기록벽(記錄癖) 때문이다.
그는 ‘남천일록’에 일기 쓰기의 의미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1801년 5월 26일 일기 내용이다. ‘일기의 경우에는 크건 작건 모두 기록하고 많건 적건 다 기재할 수 있다. 남겨두어서는 시름을 덜어내니, 때로는 쓸모없는 바둑 장기보다 낫고, 상대에게 보내어 서로 위로를 하니 편지 종이의 소략함을 크게 능가한다’(위의 논문 268쪽)고…. 그 덕분에 기장지역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깨알 같은 이야기를 ‘남천일록’에 남겼다. 심노숭은 유배 일기에 서울 이방인의 시각으로 기장 사람들의 일상을 아주 생생하게 담았다. 특산품 기장미역을 싸게 사서 이를 되팔아 이득을 남긴 뒤 본가로 돈을 보내기도 했다는 ‘슬기로운 유배 생활’까지 기록했다.
유배 일기에 기장 바다에서 나는 해물 가운데 미더덕의 사촌 격인 ‘오만동(五萬同)’에 관해 꽤 많이 썼다. ‘오만동이라는 것이 살찐 배꼽처럼 생겼는데 양기에 좋은 약이라고 한다’고 소개한 대목(정경주 정길연 외, ‘옛길 따라 만난 부산’, 부산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 2020.12, 60쪽)은 익살스럽다.
심노숭이 유배를 가던 길과 유배에서 벗어나 고향 서울로 향하던 길에는 기장옛길의 자취가 묻어난다. 이 역시 심노숭의 ‘기록벽’ 덕분이다. 심노숭은 1801년 2월 당시 기장현으로 유배 왔다. ‘남천일록’에 자세한 유배 노정이 기록돼 있다. 서울에서 파주 서빙고 용인 충주 풍기 안동 의성 영천 경주 울산과 남창(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을 거쳐 기장으로 이어졌다. 이 중 기장옛길 구간은 동해안을 따라 울산 경계인 화철령을 거쳐 장안천 좌광천 일광천을 건넌 다음 기장읍성 동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1806년 심노숭이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던 길은 달랐다. 동래읍성으로 간 뒤 범어사 양산 밀양 선산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대로를 택했다. 기장에서 동래에 이르는 이 길은 기장읍성 남문에서 용소골(용소웰빙공원), 신명역(도시철도 4호선 안평역 자리)을 지나가는 코스다. 용소옛길 약 200ｍ 구간은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안평마을 옆 고촌리에는 1400여 년 전의 수레바퀴 흔적이 확인되는 도로 유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기장옛길은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다.
기장옛길 중 용소옛길이 스토리텔링의 옷을 입고 깨어난다고 한다. 기장군은 기장읍성 남문에서 이명순 의사 공적추모비(영락동산)에 이르는 총 2.7㎞의 용소옛길을 탐방로로 정비할 예정이다. 용소옛길의 잔도(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 구간은 옛길 그대로 재현하듯 자연 친화적인 흙길로 만든다니 반갑다. 길은 사람이 다니기에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잊힌다고 하지 않는가. 이왕 옛길을 깨워내는 김에 치장하는 것은 버리고 재현에만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편집국 부국장, 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