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30분, 언제부턴가 이 시각만 되면 누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하듯 눈이 떠집니다. 깨는 시각이 점점 더 빨라진다는 것은 서둘러 해야 할 무엇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뜻일까요. 사방은 그야말로 깊은 어둠에 싸인 채 아주 고요합니다. 벽에 걸린 시계소리만 척, 척, 척, 끊임없이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일정하게 또박또박 걸어가는 벽시계의 소리를 따라 어딘가로 걸어봅니다.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살 때도, 차를 마시며 벗들과 수다에 빠졌을 때도, 글을 읽거나 쓸 때도, 누군가와의 이별로 아프게 뒹굴 때도, 병원 침상에 앓아누웠을 때도 내 시계는 저렇게 끊임없이 걸었겠지요. 하지만 나는 내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소비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발등에 떨어진 삶의 무게를 견디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시간의 흐름을 외면하고 싶었을까요.

얼마 전 SNS에 올라온 어느 작가의 그림을 여러 편 만났습니다. 그분의 그림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림마다 빠지지 않는 소재가 있는데 바로 시계입니다. 산자락에든, 들판에든, 하늘에든, 도시에든 장방형의 크고 작은 벽시계들이 서 있거나 드러누워 있습니다. 그런 시계를 어깨에 메고 어딘가로 걸어가거나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등에 짊어진 시계는 영락없는 관의 모양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주검처럼 멘 채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 늘 헤매고 있지 않을까요.

세상 어디에든 시간의 관은 그 주인들에게 업혀 어디론가 걸어갈 것입니다. 꽃나무 곁에 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웃고 있을 때도 마지막 당도해야할 방향으로 흐르고 있겠지요. 이 절대적인 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거나 아니면 잊고 있거나 아예 처음부터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겠지요. 대개는 자신의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아옹다옹 난리법석입니다. 날이 새면 여기저기서 또 시끄러운 소리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간까지 여지없이 뭉갤 것입니다.

느닷없이 만나게 된 그 그림들은 내 지난 시간을 마구 흔들어 깨웠습니다. 새삼스럽게 꺼내 본 내 흔적들은 엉성하기 그지없습니다. 독특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나도 저들처럼 시계를 둘러메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시계 그림의 기에 눌려 한 며칠 몸과 마음을 좀 앓았습니다. 외면하고 싶었던 답을 마주했기 때문일까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주 짧은 유한의 세계를 살다 갈 뿐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나도 알게 모르게 나만의 세계를 그리며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습관처럼 먹고 자고 웃고 울며 화폭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생은 이것과 저것의 색들이 오묘하게 섞인 그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붉은 듯 푸른 기운이 돌고, 푸른 듯 붉은 기운이 도는 그림. 땅이다 싶으면 물의 냄새가 나고 풀꽃이다 싶은데 하늘의 냄새가 묻어 있어 이것과 저것의 특별한 경계가 없는 그림. 서로에게 스며들어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서로를 살려내는 따뜻하고 다정한 그림.

‘그가 따 온 감이 푸르다/그가 따 온 고추가 푸르다/붉은색과 푸른색을 구별하지 못하는/그가 지나온 밭고랑엔 여전히/붉은 것들과 푸른 것들이 섞여 있다/익은 것이나 풋 것이나/뭔 그리 먼 사연이겠냐/한 소쿠리 설익은 색들을 안고/무색하게 웃는 그의 계절/색이 섞여 신비해진 그림처럼/색을 지워 길이 된 역사처럼/적과 녹의 분별이 없는/그의 심심한 화폭 속으로 따라 들어가면/벌레구멍 숭숭한 뒷장이 명화다’ -졸시 ‘명화의 내력’

젊은 시인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올 들어 유난히 시인의 부고를 자주 받습니다. 그들은 이제 메고 있던 무거운 시계를 내려놓고 편안해졌을까요. 삼라만상에 자신만의 색깔을 비벼 넣어놓고 떠났을까요. 마침내 자신의 시간을 유한에서 무한으로 돌려놓고 경계를 지운 명화가 되었을까요. 그들의 부고 앞에서 나는 생의 후반을 어떻게 그려야할지 고민합니다. 죽음이란 평생 그려온 그림에 경건하게 찍는 마지막 화룡점정이며 낙관일 것입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