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르누아르 라미네테 레드 플라넷 발레리나 마틸다 섬머 레이디. 이것은 장미의 이름이다. 마스크를 파고드는 짙은 향기를 따라 장미 정원까지 들어왔다.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로운 장미꽃이 만발했다. 연한 분홍색 띠는 소담한 장미 앞 하얀 철재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섬머 레이디, 1992, 독일, 탄타우, 연핑크의 우아한 장미에 산뜻한 꽃향기를 가지고 있다. 여름에도 계속 올라오는 품종이다.”

그 옆의 표지판에는 “마틸다, 1988, 프랑스, 메이앙, 살짝 홍조를 띄운 소녀의 모습처럼 부드럽게 번지는 …….”라고 씌어 있다. 나는 눈으로 화살표를 그으며 장미와 장미 이름의 대응 관계를 찾아보았지만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꽃이 수줍게 피어 있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꽃이 제 존재를 부끄러워하고 처신하기 어려워할까? 아마도 그 말을 하는 자신을 꽃에 투사해 표현한 것이겠지. “새들도 슬피 울며 날아간다”고 쓰는 이도 적지 않다. 이렇게 쓰는 이는 사랑하는 이와 결별했거나 자기 기분대로 감정 이입한 것일 거다. 자기감정에 도취해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텍스트는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그것에 관대한 편은 아니었나? 작가라고 해서 자연이든 사물이든 타자든 함부로 판단해도 될까? “개 같은 놈” “돼지처럼 먹어대는” 식으로 동물을 비하하는 데 익숙해도 괜찮은 걸까?

말 통하지 않는 사물의 편에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침묵하는 상대방을 제멋대로 해석하게 된다. 적극적인 부정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수줍어하는 줄 알고 덥석 손을 잡는 경우도 생기지 않을까?

자연을 노래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서정을 노출하고 어머니의 희생을 찬양하는 작품에 우리는 중독되지 않았을까? 뭔가 불편한 시는 배척하고 깨우침이나 위로, 힐링을 얻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정의해도 좋을까? 예술은 그런 편리하고 실용적인 기능을 해야 할까? 선언문을 쓰고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는 돌아서서 여성 혐오적인 문장을 짓는 작가가 진보적이고 올발라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협회니 작가회의니 하는 집단에 가입해 활동해야만 작가 인증서가 있는 진짜 작가로 대우받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에 문보영은 ‘하품의 언덕’이라는 소설책을 냈다. 그는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고 여러 권의 산문집을 낸 에세이스트이며 일기 딜리버리, 브이로그 유튜브 등도 운영하는 작가이다.

“시인이 무슨 소설책이야? 시나 잘 쓰지!” 이런 말은 내가 장편소설책을 냈을 때 들은 말이지만,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장르 해체라는 말도 식상할 정도다. 그의 소설책 읽다가 밑줄 그었다. “나는 책을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의 낱장과 대화하는 사람이에요. 책을 찢으면 책의 생김새가 다 똑같아서 이 책과 저 책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않음에 서서히 중독됩니다.”

당대의 젊은 시인들이 ‘작품 딜리버리’를 한다. 마음속으로 세어보니 다섯 명 넘는다. 그들은 이메일로, 우편으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시 일기 콩트 등을 써서 보낸다. 스스로 구독자를 찾아 최소한의 구독료를 받고 일상 속에서 창작할 경제적 여유와 계속 쓸 열정을 확보한다. 나는 얼마 전에 엽서를 받았다. 정다연 시인의 ‘계절우편’을 택배기사가 전해줬다. 정 시인은 자신의 방에서 밤늦도록 종이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직접 쓴 글을 동봉해 독자에게 보내는 일을 한다. 그는 “대상에 대한 차분하고 끈질긴 탐구의 태도”(평론가 박상수)를 견지하는 젊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에 있어서도 타자의 고통을 안다고 쉽사리 말하지 않는다.

젊은 시인들은 청중 가득한 강연장보다는 자신의 방구석 작은 책상 앞에서 독자에게 편지를 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지막하고 정교하게 무력한 방식으로. 소규모 독립문예지를 만들어 파는 시인도 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고, 공무원 시험에 목맨다고 욕먹는 이 세대의 작가야말로 미투 이후 문학을 아프게 깨우치고 깨뜨리기 시작한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이기기 위한 힘은 없어도 자신을 마주할 용기를 내는 젊은 시인, 절대적 권위를 추앙하는 게 아니라 “네 네 네”의 반복으로 전복하는 시인(‘지극한 효심의 노래’ 이소호) 이 있다. 착한 척도 큰소리도 단언도 하지 않는 시인은 말한다. “소심한 게 아니라 섬세한 거야. 물방울은 똑같아 보이지만 모두 다릅니다”(‘무지개가 나타났다’ 강혜빈)고.

김이듬 시인·책방이듬 대표·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