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백화점 앞에는 영업 시작 두 세 시간 전부터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몰려든 고객들로 긴 줄이 생기는데, 이를 ‘오픈 런(Open Run)’이라고 한다. 백화점 문이 열리면 소위 명품으로 알려진 제품을 먼저 구입하기 위해 해당 매장으로 뛰어간다고 해서 생긴 신조어이다. 지난해 백화점 전체 매출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전년 대비 9.8% 감소했으나, 해외 유명 브랜드 매출은 오히려 15.1% 증가했다고 한다. 근년에 두세 차례 가격을 인상했음에도 인기 제품은 입고되는 즉시 판매되는 통에 매장에는 재고가 없을 때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여러 요인으로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여 거래처와 끈질긴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중소기업은 이러한 명품기업이 부럽다.
명품에는 럭셔리 브랜드는 물론 일반고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제품도 포함된다. 독일 경영학의 대가인 헤르만 지몬(Hermann Simon)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 매출 40억 달러 이하이면서 세계 3위 이내이거나 한 대륙에서 1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기업을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으로 명명했다. 2017년 이 기준을 충족하는 히든챔피언 기업은 전 세계 총 2734개사이며, 이 중 1307개가 독일 기업이고, 한국 기업은 23개에 불과했다. 이러한 명품 기업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장인정신에 기반한 기술력과 세대를 이어가는 긴 역사가 핵심적인 특징이다.
프랑스 최고 명품기업인 에르메스(Hermes)의 핸드백은 까다롭고 엄격한 품질관리를 통해 제작된다. 수십 년의 경력을 지닌 장인한 사람 한 사람이 전 제작 과정을 책임지는데, 각 제품에는 그 장인의 작업 탁상번호와 제작연도가 새겨져 있다. 수십 년이 지나 문제가 생기면 해당 장인에게 배송되어 수리를 받는다. 또한 히든챔피언 기업은 매년 연구개발(R&D)에 매출액 대비 평균 6%를 투자하고 있으며, 직원 1000명당 특허 신청건수가 31건으로 대기업의 6건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러한 기술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명품기업은 직업학교 및 대학 등 교육기관과 밀접히 협력하여 기능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명품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절대적 시간이다. 명품에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세대를 이어 축적된 기업의 철학과 브랜드에 대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 단순히 품질의 우수함만으로는 당대에 명품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운 것이다. 세계적인 히든챔피언 기업의 평균 업력은 66년이며, 이 중 38%의 기업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보유한다.
이런 명품기업과 비교하여 국내 중소제조업의 현실은 어느 수준인가. 국내 제조업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의 첨단 산업 분야에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지만, 대부분의 중소제조업체는 대기업에 종속된 협력업체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독자적인 기술 경쟁력 확보가 미흡한 실정이다. 여기에 노동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지난해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초과하면서 국내 인구가 감소하고,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제조업의 노동력 부족 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대기업의 노동 집약적인 공장은 이미 오래 전에 인건비가 싸고 노동력이 풍부한 동남아 지역으로 생산 거점을 옮겼으며, 국내 완성차업계도 해외 생산을 확대하여 2006년 70%를 상회하던 현대자동차의 국내 생산 비중은 2012년 이후 40%대로 급감했다. 또한 가업 승계에 따른 과다한 상속세와 각종 규제로 대(代)를 이어 기업을 경영하고자 하는 기업인들의 의욕도 크게 위축돼 중소제조업의 경쟁력과 위상이 흔들리는 실정이다.
국내 중소제조업체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서는 긴 역사와 기술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기업은 먼저 제조기술 개발 위주의 연구 활동에 머물지 말고 해당 분야의 핵심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과 교육기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중소제조업체가 대를 이어 명품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2018년 기준 국내 중소기업 가운데 50년 이상의 업력을 지닌 기업은 전체의 0.2%이고, 평균 업력은 11.2년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우수한 전문경영인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기가 쉽지 않으며, 안정적인 오너십(Ownership)에 기반해 경영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활하게 가업을 승계해야 하는데, 60%에 달하는 상속세율과 각종 규제는 가업 승계를 어렵게 한다. 가업 승계를 부(富)의 대물림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아닌, 일자리와 국부(國富)를 창출해 내는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민철 ㈜디프로매트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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