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원인은 알 수가 없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오랑’이라는 이름의 한 도시에서 쥐들이 피를 토하며 죽기 시작했다. 이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정부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도시를 폐쇄한다. 알베르 카뮈의 1947년 소설 ‘페스트’ 이야기다. 카뮈는 소설 서문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의 말을 인용했다. 당시에는 페스트라는 전염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 전염병 상황이라는 상상 속에서 우리가 늘 만나고 실제로 겪고 있는 일들을 돌이켜본다는 의미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위기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부류의 인간 군상을 대변한다.

전염병과 영웅적으로 맞서 싸우는 의사 리유, 리유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해서 적극 돕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여행객 타루, 탈출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어린 아이의 죽음을 목격한 후 마음을 바꾸고 보건대를 돕는 타지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는 신이 죄인들에게 내린 벌이라 설교하며 회개를 강조하다가 어린 아이의 죽음을 목격한 후 도움의 손길을 뻗는 파늘루 신부, 타인들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아서 불법으로 돈을 버는 코타르, 그리고 도청의 계약직 서기로서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사람들을 돕는 그랑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재의 코로나 국면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도 하겠다.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카뮈는 리유나 타루가 아닌 그랑을 가장 영웅적 인물로 꼽는다. 프랑스어로 ‘아주 큰’ 또는 ‘위대한’이라는 뜻의 이름과는 달리 그랑은 전혀 위대하거나 큰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체구도 작고 언어 장애를 지닌 인물로서 직업도 변변찮은데다가, 가난으로 인해 아내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초라한 인물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선한 인물로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도시 안에서 보이지 않는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행하는 인물이다. 그러기에 카뮈는 그를 “이 보잘 것 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이라 칭함으로써 그랑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

사실, 리유와 타루 같은 인물들은 위기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영웅들이기에 그들의 노고에 걸맞은 평가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랑처럼, 하고 있는 일의 하찮음과 그들의 낮은 직위 등으로 인해 영웅으로 인정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묵묵히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는 인물들이야 말로 사회의 진정한 숨은 영웅인 것이다.

지난 2년여 동안 겪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 간의 싸움이기도 했다. 위기를 더 극심한 위기로 몰고 가는 이들을 목도했고, 나와는 무관하다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다수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들도 목격했으며, 나아가서 타인의 위기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러나 우리는 리유나 타루와 같은 눈에 띄는 많은 영웅들과 더불어 눈에 띄지 않는 더 많은 그랑 같은 영웅들도 만났다.

수많은 민원과 사건 사고들을 처리하고 수습하기에 쉴 틈이 없었던 현장 공무원들, 의료인들과 함께 그들의 뒤에서 업무를 보조했던 요원들, 그리고 의료시설에서의 각종 폐기물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처리하는 일을 해 온 미화원들이 바로 그러한 영웅들일 것이다. 그들은 카메라 렌즈나 언론에 제대로 포착되지도 않았던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이기에 더욱 기억돼야 하는 고마운 영웅들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이타적 헌신 덕분에 인류는 다시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인류에게 의외의 교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타인에게 병균을 전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일상에서 말과 글과 행동으로써 ‘내’가 남을 아프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병균을 옮길 수도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행히도 우리 각자 안에 서식하는 이 무서운 균에는 백신이 없다. 각자가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성찰함으로써 사멸시키거나 억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진 깨끗한 세상이 도래할 때쯤에는 타인과 사회를 아프게 만드는 우리 각자 안의 병균 역시 퇴치되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길 기대한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페스트’ 중에서)

인문학당 달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