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이 쓴 역사책 제목에는 거울 감(鑑) 자가 들어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동국통감(東國通鑑)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국정을 책임지는 지도자에게는 역사가 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때 비춰보는 거울이어야 한다. 국정 책임자는 역사를 통해 시대적 소명을 인식해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고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빛나는 역사에서 희망을 찾아 시대의 소명을 확실히 구현해 나가야 한다. 지도자가 비뚤어진 거울에 비추어 판단하면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치욕을 안겨준 고난은 1910년 일제에 나라가 망한 사건이다. 다음 두 장면을 필자는 잊을 수 없다. 당시 집권당 당수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보내 나라를 넘기는 비밀 협상을 벌였다. 일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는 나라를 넘기면 조선 고위직들에 막대한 은사금을 줄 것이라고 말하자 이인직은 총리대신 이완용도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가 고종과 순종을 이왕(李王)으로 봉하겠다고 하자 이완용은 대공(大公)으로 격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조선 민중의 반발을 우려한 일제는 이왕으로 결정했다. 대공은 왕 다음가는 직위다. 조선의 진정한 왕은 이미 망한 명나라 임금이고, 조선 왕은 제후에 불과하다는 뼛속 깊은 사대모화에 충실했던 집권당 노론의 역사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어 조선을 병탄하면 민중의 소요가 우려된다고 하자 중국에서 일본으로 종주국을 바꾸는 것이니 별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1859-1925) 선생은 나라가 망한 다음 해 ‘꿈에 금나라 태조에게 절하다’는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를 썼다. 왜 나라가 망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금태조 아골타(1068-1123)와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쓴 글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오랑캐로 멸시하던 금태조를 민족의 영웅으로 바라본 글이다. 금태조가 “너는 먼저 어떤 역사책을 보느냐”고 묻자 사략(史略)과 통감(通鑑)을 본다고 대답했다. 사략은 십팔사략(十八史略), 통감은 자치통감 요약본으로 중국 역사책이다. 이 대답에 대해 금태조는 “그렇다면 조선 인민의 정신에 자기 나라 역사가 없고 다른 나라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중략) 처음 배우는 교과가 이와 같으면 어릴 때부터 머릿골 속에 노예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다 노예 학문이고 평생의 사상이 모두 노예 사상일 것이다”고 평가했다.
이 두 장면은 반드시 자기 나라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제일 먼저 공부해야 하고, 자기 나라 역사를 자기 눈으로 바라보아야 역사가 반듯한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과 다른 역사에서는 아무런 교훈도 희망도 얻을 것이 없다. 이런 반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가 조작된 역사는 아닌지, 우리 역사를 일본, 미국, 중국인의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지 성찰하여 바로 세워야 한다.
최근 윤봉길(1908-1932) 의사 기념관에서 한 유력한 대권 후보가 출사표를 냈다. 이 자리에서 불편한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념 편향적인 죽창가만 부르다가 지금 여기까지 왔다. (중략) 한일관계에서는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우리 후대가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진상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또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 실용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관계. (중략) 이 정부 들어와서 망가진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이런 것들과 한일 간의 안보협력이라든가 경제 무역 문제 이런 현안들은 다 같이 하나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랜드 바겐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하고….”
이 후보는 불편한 한일관계가 우리 책임이고 과거사는 별것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우리 역사를 가해자인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한일 간 갈등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한국에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아서다.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하면 지금의 우리 국력에 비추어 오늘날 한일 간 경제적 갈등은 소소한 문제다. 진정한 사과는 일본의 국격을 높이는 일이다. ‘죽창가’가 이념 편향적인 노래로 한일관계 악화 원인이라고도 했지만,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가사가 아니다. 광복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말한 다른 대선 후보의 발언에 대해 위험한 역사관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미군 사령관이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신세가 대한민국이라는 인식이다. 우리 역사에 관한 공부가 대단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 후보는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안타깝고 한심한 현실이다.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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