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5월 11일, 2차 세계 대전 동안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 첩보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15년간의 끈질긴 추격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그의 ‘생각 없는’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는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위대한 인물이라고 여자 친구에게 ‘자랑’하면서 들통이 났다. 그리고 약 1년 후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 과정은 유대계 출신의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에 의해 기록된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악의 평범성’으로도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판된다.

법학자이기도 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아이히만을 다른 각도로 조명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어 연상의 여인과 10대 소년과의 러브스토리 정도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정작 이 책은 정의와 진실을 비롯한 다양한 철학적 의미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인문서적이다.

소설 속 여 주인공 한나는 2차 대전 동안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수송하는 독일인 감시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대인들을 한 교회 건물에 가두어 둔 상태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지만 그녀는 다른 감시원들과 함께 그 건물의 출입문을 열어 주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불 타 죽게 만든 혐의로 기소된다. 그러나 재판 내내 그녀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고 따지듯 묻는 재판장에게 그녀는 도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달리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제 말은 …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의 질문은 진심이다. 그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소설 속 그녀는 길에서 구토하는 어린 소년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고 씻겨준 따뜻한 마음의 여인이다. 살면서 악한 동기를 지닌 채 어떤 일을 저지른 적도 없다.

소설 속에서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과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운’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자신의’ 진실과 ‘자신의’ 정의라는 점이다. 이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따라서 ‘공무원으로서 국가를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이며, 만약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는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정의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랬던 한나가 유죄를 선고 받고 복역을 하면서 글을 배우게 된다. 인문학적으로도 ‘문맹’이었던 그녀는 많은 인문 고전들을 통독하기 시작한다. 그 속에는 한나 아렌트가 쓴 ‘아이히만 보고서’도 끼어 있다.

이제 그녀는 인문학적 고찰과 사유를 통해 세상과 삶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로써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의미와 자신의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리화했던 자신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 왜 잘못인지를 몰랐던 문맹 시절의 ‘생각 없음’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문학을 깨친 이후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한나의 ‘문맹의 깨우침’은 ‘인문학적 눈 뜸’을 의미한다. 그녀를 눈 뜨게 해 준 이러한 인문고전은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기원 전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인문철학자들의 연구와 고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가 없다면 인간은 ‘왜, 어떻게 사는가’라는 질문 한 번 던져보지 않고 그저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짐승들과 매한가지의 존재가 아니겠는가.

인문학적 ‘무지함’ 또는 ‘생각 없음’이 초래한 아이히만의 악행은 역사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학대나 폭력, 다양한 형태의 약자를 향한 가혹 행위들처럼, 갈수록 더 잔혹해지는 우리 사회 곳곳의 악행들을 행하는 이들은 결코 괴물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고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 못 한다’. ‘뭐가 문제냐’고 도리어 묻는다. 문맹 상태의 한나다. 인문학적 공감과 생각의 부재다.

끝으로 소설 속 한나가 판사에게 던졌던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자. “당신이 그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불행히도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귀히 여기는 수학이나 과학에서는 찾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인문학적 사유와 판단 없이는 언제든 아이히만의 악행이 되살아 날 수 있는 ‘악의 평범성’의 시대에 던져져 있다.

인문학당 달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