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자가 부산에서 개최된 주요 학회 만찬에서 건배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부산 지역에서 개최된 학회인 만큼 “가덕 신공항을 위하여”란 건배사를 과감히 외쳤지만 다른 건배사와 달리 반응은 냉담했다. 이견 있음과 뜨악함이라는 분위기가 순간 엄습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은 분들이 어찌 한두 분뿐이겠는가. 날이 갈수록 실로 지방에 산다는 절망의 체감도가 더욱 강해지기만 한다.
수도권에서, 그리고 중앙에 대해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의 목소리를 높일 때 우리는 마치 아프가니스탄의 독불장군 ‘탈레반’과 같은 존재가 되곤 한다. 명분은 있으나 결코 용납되거나 이해받지 못하며, 시대적 정서에 동떨어진 존재감이 물씬 풍기는 탈레반의 이미지로 다가서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 앞다투어 발표되고 있다. 부동산 안정, 불평등 해소, 기후변화 대응, 연금개혁 등에 관해 후보들의 공약이 열띤 경합을 보이고 있지만, 어디에도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에 관한 이슈는 정치권과 중앙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비단 이번 대선뿐만 아니라 과거 대선 후보들도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에 관한 관심과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실제 노무현 정부 이후 제대로 실행에 옮긴 대선 후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선뿐인가.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도 매한가지였다.
정치는 유권자 머리 수와 표심에 따라 움직인다. 이번 대선은 수도권 거주 유권자 수가 지방 전체의 유권자 수를 추월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해결할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요구보다 GTX-D 노선 연장이나 경기북도 신설 등 수도권 중심의 이슈에 대선 공약이 집중되는 게 우리 지방민에게는 씁쓸한 소외감만 안겨준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암울한 현실을 초래한 코로나19 확진자 중 70~80%가 절반에 이르는 수도권 거주자 비율을 훨씬 상회하여 바로 수도권 밀집에서 발생하고 있는데도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지 않다. 앞으로 코로나와 같이 또 다른 치명적 바이러스의 대유행 가능성을 점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회 양극화의 주범인 부동산 폭등이란 재앙 역시 수도권에 숱한 사람들이 몰린 결과라는 사실도 애써 무시된다. 매년 대학 졸업 후 지역 일자리 부족으로 수도권으로 발길을 옮기는 젊은이들이 많아 지방의 소멸은 가속화되고, 수도권의 밀집도는 가중된다. 수도권 주택 부족과 집값 폭등을 현실성 없는 수백만 호 주택 건설로 해결하려는 임시방편적인 미봉책만 남발되는 게 유력 대선 후보들이 내세우는 대선 공약의 민낯이다.
이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정책만이 수도권 집중과 과밀화에 따른 수도권 자체의 고통과 애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정책 대안이자 정책 수단이라는 걸 수도권 주민들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전 국가공동체적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전략적 시도와 노력 역시 필요하다. 중앙과 지방 간 교환이론에 근거한 정치적 딜(deal)이라는 차원에서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밀집도를 차지하는 고리원전과 같은 고위험성 시설물 유지나 유치에 따른 위험부담의 반대급부 요구도 당당히 균형발전의 논리에 담아야 한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정책의 배제와 외면이 단순히 지역 소멸의 위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토대를 허물어 혼란과 쇠락으로 이끌 악성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은 과연 지나친 논리의 비약인가. 이제까지 아젠다 개발과 제시에만 치중해왔던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지자체 간의 연대는 물론 수도권 주민들과 공감할 수 있는 문제 제기와 전략의 부재를 고민하고 이를 극복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일이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이야말로 곧 밀어닥칠 국가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전략적·정책적 ‘백신’이라는 자각 없이는 차기 대선 이후의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 명약관화하다. 대선 후보들의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지지 의사는 이미 진부하다 못해 식상하기조차 하니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이라도 받을 일이다. 우리는 자기식의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지역의 ‘탈레반’이 결코 아니다.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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