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하루가 멀다고 각종 공방과 폭로, 말실수, 가십과 루머가 쏟아진다. 언제부터인가 정치의 풍향계 역할을 맡게 된 여론조사가 민심을 부추겨 집단지성의 발로여야 할 공론장을 바람 타는 경마장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곳의 마권을 파는 이들은 소위 정치평론가라 불리는데, 늘 그렇듯 이미 벌어진 결과를 원인으로 소급해 표면적 현상의 배후에 정치 고수들이 꾸미는 신의 한 수가 숨어있는 듯, 마치 그 비밀을 자신만이 꿰뚫어보는 듯 떠벌리곤 한다. 그들은 영묘한 신탁을 풀이하는 현대의 영매들이다.

물론 정치는 고도의 지능을 요하는 영역임이 분명하다. 천진난만한 꿈과 이상만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꿈쩍도 않는다. 아주 작은 질서 하나를 바꾸는데도 온 세상이 떠나갈 듯 강력한 문제 제기와 끈질긴 설득, 간담이 서늘한 위협과 슬기로운 타협, 때로는 협잡마저 필요하다. 정치가에게 필수적인 미덕으로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간계를 함께 요구했던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녀가 가급적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도모하거나 여차하면 그녀에게 당당히 맞서기까지 하는 영웅적 존재도 있다. 위대한 정치가란 이처럼 불굴의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실행에 옮겨 결국 행운을 거머쥐는 자이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다분히 마초적인) 정치관은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기본원리로 자리잡았고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한 국가는 국가의 현실적 존립과 발전을 위해 자기만의 논리를 갖는다. 폭력과 악덕, 약속의 파기와 적과의 거래도 정치인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국익을 위한 이성적 선택이라면 충분히 정당하다. 국가가 필요하다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랴. 이러한 냉혹한 원리는 대영제국의 확장에서 가장 여실히 드러나는바,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얄미울 정도로 치고 빠지면서 국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외교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대영제국은 무조건 많은 땅을 점령하기보다는 세계 곳곳의 요충지를 차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 케이프타운, 그리고 홍콩과 싱가포르는 모두 대륙의 입구였다. 이에 더하여 사악한 ‘갈라치기(divide and rule)’ 전략은 식민통치에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그것은 제국 일본이 고스란히 배워서 자신의 식민통치에 활용한 바로 그 전략이었다.

이처럼 지나치게 현명한 국가이성의 정치관이 완전히 바뀌게 된 계기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다. 이념이 정치와 전쟁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어 옛 종교전쟁처럼 사투를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거의 종교적 교리에 맞먹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불특정의 대중을 사로잡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손익 계산과 타협보다는 도덕적 원칙과 적의 절멸이 목표로 설정되었다. 20세기 이래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의 특징을 지니는데, 노련한 정치지도자와 참모들이 밀실에서 결정하고 집행하던 옛 ‘현실정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제 현실적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오히려 상식이다. 어떠한 일을 꾸미더라도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힘들다. 물론 상식이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였건 불특정 다수의 광범위한 동의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상관없이 민주정치의 필수적 요건이 되었다.

상식은 반드시 ‘중도’의 논리는 아니다. 설령 특정한 정치노선이 좌나 우로 치우쳤다 해도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상식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1980년대 영국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정권이 일부러 ‘납세자’라는 용어를 내세워 그때까지 대중의 상식을 지배해왔던 좌파의 복지 정책을 무상으로 얻어먹으려는 자들의 논리로 깎아내리고 상식을 전환시켰던 사례는 비근한 예다. 또는 현재 막 시작되고 있는 기본소득 논의도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급진성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논리를 잘만 가다듬는다면 사회의 부는 늘어가지만 불평등이 강한 사회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저 애매한 ‘통합’의 수사학을 늘어놓으며 ‘중도’의 표심만 바라보는 소극적 자세로는 결코 대세를 얻을 수 없다. 정치인들의 잔꾀가 통하기에는 이미 일반 시민의 정무 감각이 너무 발달해 있다. 올해 초 느닷없이 제기된 ‘박근혜 사면론’의 예처럼 도덕적 명분과 법 감정에 어긋나는 영묘한 ‘신의 한 수’는 더 이상 성공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자꾸 지지율 운운하며 비상식적인 정치공학과 허황된 결단에 군불을 때는 정치평론가들이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있다. 과연 그들은 우리시대의 마키아벨리 혹은 제갈량인가? 철지난 제갈공명 코스프레가 보기 지겹다.

부산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