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지킬과 하이드’는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 새로운 역사를 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인 1886년 작품이다. 무의식이라는 영역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이전에 소설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는 보여지는 것과는 다른 억압된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지킬은 선하고 똑똑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그에겐 세인들의 시선이나 기대에 맞춰 억압해야만 하는 또 다른 자아, 하이드가 존재한다. 하이드는 세상이 금기시하는 모든 행동을 거침없이 일삼는 존재로서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그도 통제권을 갖고 있는 지킬이 약을 먹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불러내지 않는 한 세상에 나올 수 없다. 그러니 하이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지킬보다 더 강한 힘을 키우는 것 뿐이다. 급기야 통제불능의 하이드가 잔인하게 사람들을 살해하기 시작하자, 지킬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미약하게나마 선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킬의 존재가 남아 있는 동안 말이다. 그렇게 지킬은 하이드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13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도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올해 개봉된 영화 ‘크루엘라’에서 잘 드러난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영화에서는 한 여성 안에 에스텔라(별)와 크루엘라(잔인함)가 공존한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에스텔라에게 크루엘라를 세상에 드러내면 안 된다고 교육한다. 그러나 세상은 작은 ‘별’로서 버티기엔 너무 어둡다. 그리고 그 어둠의 한복판에는 에스텔라가 속한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바로네스 남작부인이 있다. 그녀는 “자신 이외의 타인들은 모두 성공의 걸림돌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타인들의 감정 따위를 신경 쓰다 보면 위로 올라서는 게 아니라 이름도 없이 사라지게 될 뿐이라고 말한다. 단적으로 그녀는 자신 이외의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은 ‘패자들이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 속 하이드의 영화 버전이자 진정한 크루엘라는 바로네스라 할 수 있다.

바로네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에스텔라는 더 이상 에스텔라로 사는 것을 거부한다. 유아독존의 바로네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선한 에스텔라로서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대항할 수 있는 크루엘라만이 바로네스의 상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과 바로네스와의 관계를 알고 난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눈물의 상봉도 용서도 없다. 시대의 변화가 단적으로 읽히는 장면이다.

더 이상 ‘피는 물보다 진한’ 시대가 아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부당한 세상에 냉정하게 도전장을 던지는 크루엘라의 모습은 사회에서는 아직 초년생에 불과한 그녀가 ‘감히’ 그 업계의 대부인 바로네스와 대결하고, 틀을 깨는 변화와 참신함으로 기득권에 정면 대결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버려진 옷들을 재활용하여 만든 드레스와 나비 번데기를 엮어서 만든 드레스, 그리고 가연성 소재를 이용한 화려한 색감의 변신 등과 같은 영화 속 명장면은 형식과 경계를 넘는 현 시대적 특성을 대변한다. 그 하이라이트는 바로네스의 화려한 무대 위 패션쇼와 대비되는 크루엘라의 길거리 트럭 위 패션쇼다. 이때 크루엘라는 자신의 얼굴에 ‘The Future’(미래)이라는 글씨를 그려 넣는다. 이로써, 착하고 말 잘 듣고 유순한 에스텔라의 시대는 가고, 스스로 판단하고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크루엘라의 시대가 도래함을 예고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예상은 또 한 번 빗나간다. 그녀는 에스텔라가 아닌 크루엘라로 살 것을 선언하는데, 이는 지킬이 하이드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는 선하기만 한 지킬이나 에스텔라로 살아가기에는 벅찬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크루엘라는 자신만의 욕망을 위해 세상과 타인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하이드나 바로네스와는 다른 존재다. 오히려 ‘강한 에스텔라’라고 하는 편이 더 옳다. 그러기에 그녀는 영화 말미에서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바로네스를 살해하기보다는 법의 심판에 맡기는 쪽을 택한다. 이처럼 크루엘라는 ‘이성적이고 강력한 힘을 행사할 줄 아는 선’으로 해석된다.

물론 세상은 명확한 선과 악으로 이분화되지는 않지만, 이러한 특성들도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진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밖 현실에서 실력 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인 에스텔라가 부와 명예와 권력과 지독한 욕심과 야망을 모두 다 거머쥐고 있는 바로네스를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인문학당 달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