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주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고 나갈 국무총리, 일부 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반도체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힌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5월 검찰총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를 수행원 없이 방문해 이 후보자의 안내로 3시간 동안 시설을 견학했다. 이 후보자는 “윤 전 총장이 많은 질문을 했다. 반도체 분야를 미리 많이 공부하고 온 것 같았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국가 과학기술 정책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없어 불안했는데, 윤 당선인이 이렇듯 반도체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하니 안심이 된다.

한국같이 자원 없는 나라가 자원부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과학기술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 저개발 농업국으로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과감한 중화학공업 정책 추진으로 산업화에 성공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에도 순발력 있게 적응함으로써 정보화에도 성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한국은 이제 매일 급변하는 지능디지털화 시대의 길목에서 과학기술 강국으로 발전할지 아니면 추락할지 기로에 서 있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과정에는 근면 성실한 국민의 노력이 기초가 됐다. 그 위 과학기술 입국을 위한 식견 있는 지도자가 있었고, 여러 과학기술자의 알려지지 않은 뒷받침도 있었다.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쓴 ‘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는 한국이 전무 수준에서 세계 최고의 원전 기술을 갖게 되기까지 정부와 과학계, 산업계가 한마음으로 매달렸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승만 대통령은 “석탄이 땅에서 삽으로 캐낸 연료라면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라는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워커 시슬리 박사의 조언을 듣게 됐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수시로 정전되는 자원 빈국이었던 처지에서 이 대통령의 눈이 번쩍 띄었다.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했고, 같은 해 10월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세웠다.

김재관 박사에 관한 책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포스코를 만들고 조선소와 자동차산업 등 산업화가 성공하게 된 과정이 나와 있다. 김 박사는 1950년대 독일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뮌헨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금속재료 전문가였다. 그는 2차 대전에 패망한 독일이 부흥한 원인이 철강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1964년 박 대통령이 독일에 차관을 구하러 갔을 때 김 박사가 대통령에게 종합제철소가 있어야 우리 조선소와 자동차산업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국가발전 방안을 제시했고,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박태준 사장에게 포스코를 건설하도록 했다. 그 뒤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삼성전자가 ‘반도체 신화’를 일궈내 우리나라는 세계 유수의 반도체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과거엔 지리적 위치의 지정학(地政學)이 중요했지만, 21세기는 기술을 바탕에 둔 기정학(技政學)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대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데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TSMC의 덕이 크다. 시스템반도체산업의 가능성에 주목한 장징궈 전 총통이 해외 대만 과학자들을 귀국시켜 1987년 설립한 회사가 TSMC다. 이후 야당이 집권한 뒤에도 TSMC 등 첨단기업 지원만큼은 최우선 국정과제로 이어받았다.

작년 10월 일본의 100번째 총리에 선출된 기시다 후미오의 각료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얼굴이 전에 없던 경제안전보장상으로 발탁된 고바야시 다카유키(47) 의원이다. 경제와 안보를 한 데 묶는 게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핵심은 반도체에 있다. 그리고 기시다 총리는 성장전략의 첫 번째로 ‘과학기술 입국’을 제시했다.

윤 당선인은 지난달 경제6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요즘 전쟁이란 총이 아닌 반도체가 하는 것이란 말이 있다”고 했다. 7일엔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전경을 보고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인 첨단산업을 더 발굴하고 세계 일류로 키워내겠다”고 언급했다. 그런 당선인의 인식을 반영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반도체사업 초격차 확보를 위한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 당선인이 과학기술 입국을 위한 강력한 의지와 식견을 가지고, 우리나라가 이룩한 기적이 끝나지 않고 이어지도록 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