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고리원자력발전소 등 경수로 원전 부지에 사용후핵연료(핵폐기물)를 보관하는 ‘건식저장시설’ 설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건식저장시설은 공기로 핵폐기물을 식혀 보관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인데, 경수로 원전에 현재 가설돼 있는 ‘습식저장시설’(물 속 저장)의 수용량 포화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핵폐기물 영구처리장 마련 대책이 막연한 상태에서 건식저장시설을 설치할 경우 영구처리장으로 변할 공산이 크다. 영구처리장 대책을 전제하지 않은 건식저장시설 설치를 허용할 수 없는 이유다. 사업 추진에 앞서 주민 동의부터 받기 바란다.

건식저장시설 설치는 원전 가동 중단을 막기 위한 조치다. 경수로는 습식저장시설을 원전과 함께 건설하는 까닭에 핵폐기물 수용량이 다 차면 증설이 불가능하다. 고리원전(2031년)을 필두로 국내 경수로 원전 20기의 수용량 포화시기가 연쇄적으로 도래한다. 정부가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게 건식저장시설이다. 문제는 핵폐기물 영구처리장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다. 작업복 장갑 등 방사능 함유량이 낮은 중·저준위 원전폐기물 저장소를 마련하는데도 19년이 걸렸다. 1986년 부지 물색을 시작해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 세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난 후에야 2005년 가까스로 경주로 확정됐다. 이러니 사용후핵연료와 같은 고준위 원전폐기물 영구처리장을 찾는 일의 어려움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정부도 ‘2차 고준위 방폐물 기본계획’에서 그 기간을 37년으로 잡았다. 그 오랜 세월이 소요되더라도 영구처리장을 확보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지난 과정을 감안할 때 장담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차기 정부는 영구처리장 대책 없이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 재개, 수명 만료 원전의 가동 연장 등 원전 확대 정책을 시행할 방침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미 고리원전 2호기의 설계수명 연장 신청을 한 상태이다. 가동 원전이 늘어나면 핵폐기물도 증가해 저장시설의 수용량 포화시기가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차기 정부는 고준위 원전폐기물의 처분과 관련한 절차·방식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마련하고, 국무총리 산하에 전담 조직을 신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 정부가 사회적 공론화 작업을 벌이고서도 해법 도출에 실패한 터라 난항이 불가피하다. 이런 처지에서 짓는 건식저장시설은 영구처리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관건은 주민 동의 확보다. 현행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에는 사용후핵연료 등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 이해관계인·일반시민·전문가 등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칠 수 있게 돼 있다. 앞서 월성원전에서도 주민투표 등을 거쳐 건식저장시설 증설에 합의한 바 있다. 주민 동의 없는 일방 추진은 비민주적 폭거나 다름없다. 차기 정부의 국정 철학인 공정과 상식에도 반하는 일이다. 고리원전 2호기 수명 연장 시도에서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원전만큼 안전이 중요시되는 시설은 없다. 사회적 합의 없이 처리하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