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세태 꾸짖을 순수한 소리, 무질서 사회서 점차 소멸

처세 익히고 덩치만 키워…진짜 어른도 사라진 세상

정훈 문학평론가
| 입력 : 2022-05-11 19:36:37
| 본지 19면

영주동으로 이사 온 지 햇수로 9년째 접어들었다. 언덕배기 언저리에 자리 잡은 주택 3층에 입주를 했다. 이사 오고 한동안 평일 일 보러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아이들 소리가 생각난다. 옆집에 살던 초등학생 자매였다. 맑은 목소리로 까르르르 웃거나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릴 때쯤이면 마치 유년으로 소환하듯 아득한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 무렵 아이들 소리가 결코 시끄럽거나 귀찮게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였으니, 아이들은 가끔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증거라도 되는 양 생명의 가치를 불러 세우는 존재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고단한 삶의 길에서 닥치기 마련인 이기심에서 비롯하는 사회적 욕망이나, 분수에도 맞지 않은 이런저런 일들을 가만 내려놓고 쉬어가라는 신호로 여겼던 것일까.

알 수 없는 건 해맑은 아이들 소리가 왠지 천상에서 들려오는 우주의 헛기침처럼 들렸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에 대한 숱한 관념이나 정의들은 제쳐두고서라도, 우리가 아이를 보거나 떠올리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게 ‘순진함’과 ‘철없음’이다. 철딱서니가 없거나 ‘시근머리’가 없어 보이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한창 사회화 과정을 겪고 있어서 사회제도와 관습이 몸과 마음에 완전히 스며들지 않은 까닭이다.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에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구절이 나온다. 이 표현에는 어른에게 없는 게 아이에게는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른한테 원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른이 되면서 증발해버리거나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그러면 아이는 자라면서 조만간 잃어버리게 될 부분들을 가득 품고 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가 아이들을 볼 때 느끼는 이중감정, 즉 순진하면서도 철이 없어 보이는 느낌은 이런 현실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이 속한 ‘원시세계’가 주는 지복한 감정과, 사회화와 교육을 통해 공동체의 주체로 거듭나기까지의 과도기에 놓인 어딘가 ‘덜 차 보이는’ 감정이 함께하는 양가성의 시선이 아이들에게 쏟아진다.

어린이날과 뒤이은 어버이날이 어김없이 찾아왔고 지나갔다. 바로 곧이어 스승의날이 코앞이다. 어린이가 마냥 어리거나 어리석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떠받들면서 추켜세워야 할 생명체이듯, 낳고 길러준 은혜 충만한 부모에게 올리는 공경심 또한 마땅히 지녀야 한다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장차 가야 할 길과 세계를 바르게 이끌어주고 제시한 스승에 대한 존경 또한 두말해서 무엇 하랴. 아이가 지닌 무구한 마음이 철이 드는 길목에서 차츰 옅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삶의 처세가, 가정과 사회의 꿋꿋한 일원으로서 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는 아이러니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라는 기호가 뜻하는 의미대상의 정체성은 늘 생각과 관념에서만 호출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저녁이 올 때쯤 내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고 설레게 했던 아이들의 쾌활한 소리가 요새 부쩍 줄어든 느낌이다. 결혼도 꺼리거니와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하나만 낳는다는 사회분위기 탓으로만 돌리기 힘든 ‘묘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느낌을 무어라 설명하면 될까.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있고, 앞으로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의 소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에 귀를 기울이면, 내가 찾는 아이들 소리가 실제 아이들 소리라기보다는 으레 아이라면 지니고 있을 법한 ‘눈치 없는 속에 절로 나오는’ 세상에 대한 재잘거림이었다는 점을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가 불공평하고, 또한 질서와 원칙도 없이 오로지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막무가내로 욱여넣듯 조삼모사만을 일삼는 세태를 두고 속 시원하게 호통을 날릴 순진무구한 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어른이 되어서 얄팍하면서도 속내 알 길 없는 ‘처세’를 몸에 익혔을 뿐인 덩치만 큰 아이가 아니라, 그른 것과 바른 것이 절로 보여 그르고 옳지 못한 행태를 두고서는 절대 못 본 척 눈감지 않고 직언하며 야단을 칠 수 있는 진정한 아이와도 같은 어른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예전에는 그런 아이 같은 어른들이 종종 보였는데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보이지 않는 까닭이, 나 또한 덩치만 자란 아이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진정한 어른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른이 실종해버렸다는 말은 지금 이곳이 아이의 마음이 그만큼 훼손된 세상이라는 뜻과도 상통한다. 이와 함께 진정한 스승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는 말도 성립한다. 대낮에 등잔을 켜 들고 신을 찾았던 차라투스트라처럼 우리는 내색하지 않아도 이미 사라진 아이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