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감기약에 취해 까무룩 졸다 깨어났더니 한쪽 벽에 낯선 가면이 하나 걸려 반깁니다. 어둑하던 벽이 얼굴을 얻어 환해졌습니다. 양쪽 눈 주위엔 서로 다른 색의 나비날개가 반짝거립니다. ‘노란 나라로 갈까요, 파란 나라로 갈까요.’ 쓰기만 하면 어딘가로 날아오를 것 같은 날개는 이미 퍼덕거리는 듯합니다. ‘가면 하나 만들어 줄게.’ 언젠가 농처럼 하던 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고맙게도 잊지 않고 약속을 지켰군요.

수년 전 물의 나라 베네치아에 갔을 때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상점마다 진열되어 있던 가면들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박하고 해학적인 탈과는 달리 화려하고 다양해 가면들을 거느리고 있는 길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돌아보던 기억이 납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 많은 가면들 중 단 하나도 구해오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그 얘길 가끔 들먹거렸더니 ‘꿩 대신 닭’이라고 비슷한 가면을 만들어준 모양입니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동네 남정네들은 농악기를 치고 두드리며 마을을 돌았습니다. 집집마다 들어가 한 해의 풍작을 기원하고 나쁜 잡신들은 쫓아내는 행사라고 했습니다. 그중 탈을 쓴 이들의 행동이 유독 맘에 들어 어린 나는 종일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손발이 빨갛게 얼도록 주척거렸지요. 이렇게 정초에 시작된 지신밟기는 보름날이 지나고서야 끝이 났습니다. 농한기가 끝나고 농번기 준비를 해야 할 때, 또 다른 탈을 바꿔 쓸 때지요.

가면이나 탈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친친 감은 복면과는 다릅니다. 익명도 변장도 아니지요. 얼굴을 바꾸어 새로운 존재의 인격을 부여받습니다. 언젠가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드라마 ‘각시탈’이 기억납니다. 비극적인 우리의 역사 속 잃은 조국과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신출귀몰 나타나 한순간 속 시원히 악을 뒤흔들어 놓고 사라지던 ‘각시탈’. 탈의 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충천하는 기개는 물론 삶과 죽음마저 초월합니다.

영화나 연극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맡은 역할 역시 가면이라 생각합니다. 그 가면의 삶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는 그들이 극 중 역할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가와 같은 말이 되겠지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는 작품 속 인물의 가면을 쓰고 그 인물의 신분 성격 행동을 철저하게 살려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발연기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뛰어난 작품은 연출과 스토리전개도 중요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완성되지요. 가면을 쓴 대개의 예술이 그렇지 않을까요.

꼭 다문 작은 입술. 검은 눈 주위 활짝 편 날개 사이로 나무뿌리처럼 깊게 뻗은 상처. 어떻게 이 가면의 진정한 삶을 만들어 볼까. 색이며 언어 생각까지 재탄생시킬까. 그런 몰입은 창작물에 신선한 피를 흐르게 합니다. 썼다 벗었다, 웃다 궁시렁대다, 일인 다역에 빠져있는 나를 보더니 어느 날 그가 여남은 개의 가면을 더 만들어 들이미는군요. 선명한 색감이 주위의 그 어떤 것들도 무색하게 압도합니다. 아무래도 저 품은 것들이 무슨 이야기를 쏟아낼 것 같습니다.

저무는 바닷가에서, 햇살 쏟아지는 산기슭에서, 인간과 대지와 신의 영역을 쓰고 읽고 부르는 가면들. 생각만 해도 재미있습니다. 사회적, 개인적, 무겁고 익숙한 얼굴과 이름을 벗고 화려한 가면을 쓰면 먼 행성에서 온 듯 신선해지지 않을까요. 새로 부여받은 배역으로 지구별 한쪽을 두드리면 특별한 색으로 물이 들 것 같습니다. 다른 무엇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지요.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 어우러져 가면의 축제를 열어요.

‘이 나라에 당도해서야 나는 얼굴을 버리네/접근이 쉽지 않은 절벽을 넘어/뛰어내릴 수 없는 서성거림을 넘어/천년을 건너온 물의 나라//길을 늘리는 얼굴과/벽으로 걸어가는 얼굴과/허공에서 노래하는 얼굴들//여기 다 접수하고 당신, 살아 있었군/키들키들 웃으며 어디를 오래 둘러온 듯/더 이상 뭉개지지 않을 눈과 입꼬리/(중략)/다시 천년 동안 가면의 새끼들을 만들고/가면의 시민으로 반짝거릴까/ (후략)’ -권애숙 시, ‘가면의 제국’ 부분

권애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