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조용한 공간에서 손글씨를 쓰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때가 있다. 멀리 있는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인에게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오래된 친구에게 가슴 먹먹한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종이에 감정을 담아낸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에게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혹은 자기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가끔은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일상에서 종이와 펜으로 글을 써왔다.
어린 시절 선생님께 검사받는 일기장 외에 한 권의 비밀 일기장을 가졌던 경험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 때 푹 빠졌던 소설 ‘빨간머리 앤’의 주인공 앤 셜리에게 보낸 팬레터로 가득한 나의 작은 일기장에는 부모님께 혼난 억울한 마음도, 친구와 다툰 속상함도 모두 표현하며 쓰고 지우고 하면서 스스로 정리하고 이해했던 기억이 있다. 외국에서 받은 가족의 편지 한 통은 빨리 읽기가 아까워 조금씩 아껴가며 읽어 내려가곤 했다.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편지로 잊었던 추억을 되살린 경험은 모두 있을 것이다. 보내는 사람의 시간과 마음이 묻어 종이에 쓰인 편지는 언제나 기쁘다.
그러나 요즘은 일기는 물론 직장에서 필요한 자료를 태블릿기기에 보관하고 정리한다. 시작은 환경문제로, 일회용 규제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종이 사용에 대해 조심스러워진 탓이다. 그린 포스트의 2018년 보도를 보면 천연펄프로 종이 1ｔ을 만드는데 나무 24그루, 에너지 9671kWh, 물 8만6503ℓ를 사용하며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2541㎏, 폐기물 872㎏이 나온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종이 생산부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는 의미다. 한국제지연합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종이 사용량은 2017년 기준 191.4㎏이다. 이는 전 세계 1인당 연평균 종이 사용량 57㎏과 비교하면 많다고 할 수 있다. 환경단체 녹색연합은 2002년부터 식목일 전날인 4월 4일을 ‘종이 안 쓰는 날’로 정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루만이라도 종이를 아껴 쓰자는 취지다. 이날 하루 우리나라 국민이 A4 종이 한 장을 아끼면 나무 800그루를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루 평균 종량제 봉투에 들어간 종이 폐기물은 5632ｔ이다. 하루에 나오는 전국 종이 폐기물 배출량은 종량제를 기준으로 하면 27%, 재활용 기준은 33%라고 한다.
회의 자료나 각종 문서를 종이 자료에서 디지털 파일로 공유받은 뒤로, 보관이 편리함은 물론 언제 어디서나 빠르게 재편집해 사용할 수 있는 장점에 놀란다. 또 무겁게 메모장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잃어버릴 일도 없다. 펜 하나로 연필부터 만년필, 형광펜까지 사용할 수 있다. 얼마나 편리한지 개발자께 감사의 박수가 절로 나온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지고 환경을 위해 종이를 아껴야 하지만, 그래도 계절이 바뀌고 오랜만에 생각나는 친구나 은사님께는 손편지를 쓰고 싶다. 하얀 종이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좋아하는 색의 펜으로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구구절절 적어보고 싶어진다. 또 그들의 안부도 묻고 싶다. 글자가 삐뚤어질 수도 있고 맞춤법이 틀릴 때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를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아마도 받는 이는 ‘요 녀석 바빠서 정신없게 지낸다’ 하실 거다. 아니면 글자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했는데 삐뚤삐뚤한 글씨를 보고 안정되지 않은 내 상황을 걱정하실 수도 있다.
이처럼 종이로 전하는 마음에는 상대를 느끼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이 있다. 디지털로는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요즘 많은 사람은 사용이 편리한 SNS를 통해 간단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화면에 보이는 일률적인 글씨체는 읽기 편안하고 효율적이지만 누구나 같은 마음과 상황은 절대 아닐 것이다. 마치 내비게이션의 음성 지원이 내 것 같지 않은 것처럼.
벌써 12월이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코로나로 긴 시간 못 뵌 분들, 한 해 동안 감사했던 분들, 또 마음속에 섭섭함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분들에게 환경보호라는 우리의 큰 의무는 잠깐 뒤로하고 종이 한 장 펼쳐놓고 마음에 드는 펜을 손에 쥐고 사각사각 자신의 마음을 적어서 보내보면 어떨까 싶다. 종이가 된 나무도 흔쾌히 기뻐할 것이다.
박지윤 삼미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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