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남은 달력이 떨어져 나갈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나온 한 해를 뒤돌아보며 한국 사회에 드리워져 있는 짙은 그림자를 다시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다.

얼마 전부터 일본 여행문이 열리면서 최근 일본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일본 방문 주목적은 강남주 작가가 쓴 ‘비요’ 작품 현장을 찾는 문학기행이었다. 서울 강원 충청 광주 경북 부산 등 전국에서 모인 여행자 37명과 함께 한 이번 여행의 백미는 ‘비요’ 작품 속 주인공 박삼룡이 임란 때 도공으로 끌려가 평생을 도자기만 빚다가 무명인으로 사라져 간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곳이 바로 이마리였다. 이마리 마을은 여전히 도자기 마을로,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여행객 일행은 이마리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 작품 속 주인공 박삼룡과 함께 했던 조선 도공들의 무명묘지를 바라보며 전쟁 중에 끌려와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조선 도공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이마리에 자리한 한 호텔 회의장에서 ‘비요’ 작가와 함께 작품을 두고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이 남긴 상흔과 한일 간의 관계 등 다채로운 주제로 이루어진 이날의 문학 토론은 참여자들에게는 흔치 않은 경험을 제공한, 그야말로 품격 있는 문학기행의 절정이었다.

문학 현장을 탐방한 우리 일행은 마지막 날 나고야성을 방문했다. 임진왜란을 준비하기 위해 세웠던 나고야성은 본체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요새항을 앞에 둔 성은 수군을 집결시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력을 준비하는 데는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왜는 이토록 치밀하게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 조정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판단에만 매달려 있었으니 당시 조선 위정자들의 정세판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고야성 옆에는 사가현에서 건립한 나고야성 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을 둘러본 필자 눈에 임란과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들과 유물들이 먼저 들어왔다. 조선의 거북선과 왜군의 병선인 안택선이 나란히 모형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이순신의 도상도 벽에 걸려있었으며, 한국 육군사관학교에 소장된 동래부순절도도 모사본으로 걸려있었다. 또한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으며, 그들이 쌓았던 왜성의 분포도도 보였다. 정유재란의 목적이, 전쟁에 참여한 무장들에 대한 은상지로 조선반도 4도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기록해 두고 있었다.

전시된 거북선과 정유재란 기록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떠올렸다. 침략국 박물관의 오래된 유물로 남아있는 전란의 기억이 새삼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문학기행을 마무리하고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비가 흩날렸다. 임란 당시 무고하게 사라져 간 조선의 백성들과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친 도공들 생각으로 필자 마음에도 내내 비가 흩날렸다.

김해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자 바깥은 이미 어두웠고, 공항을 빠져나온 일행을 맞이한 밤공기는 차가웠다. 차가운 겨울바람 같은 현실이 또다시 우리를 맞이했다.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과 국민 안위에는 관심이 없는 국가권력기관의 전횡을 목도하면서 다시 이순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424년 전 울부짖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불귀의 객이 된 이순신의 심정을 어렵게 헤아려보았다. 백수십 명의 생명이 허물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가 없는 현실. 계속되는 참사도 참사지만 문제를 찾고 대책을 강구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정치 지도자는 보이지 않으니, 이 땅에 진정 희망은 있는 것인가? 저물어가는 한 해를 이대로 보낼 것인가?

평생 이순신 정신을 연구한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에 쓴 ‘이순신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를 다시 펼쳤다. 김종대 재판관은 이순신이 지닌 정신 가치를 사랑 정성 정의 자력으로 그의 지도자상을 요약정리했다. 지난 한 해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이 정신을 실천했는가를 반성해본다. 지도자 자리에 있는 자들이여! 송년회 모임에 남은 시간을 다 허비하지 말고, 올해가 끝나기 전에 이 책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길 진심으로 권한다.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