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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지도자의 변절과 변명…10권(바람과 구름과 비)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26> ‘소설 이용구’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2025.03.16 19:22
- 최시형 제자, 손병희가 이름 하사
- 이용구, 목숨 걸고 포교했던 맹장

- 교단 전략으로 위장 친일하던 중
- 자가당착 빠져 신념형 친일의 길
- 일진회 회장 맡고 대등합병 주창
- 동학서 축출되고 日도 토사구팽

- 비참한 말로 맞으며 죽음 앞 유언
- “바보짓 했다, 처음부터 속았을까”
- 나림 결론은 “스스로에게 속은 것”

책을 10권 쓰고도 다 말하지 못한 사연이 남는다. 미련을 해소하는 방법은 11권째를 이어 쓰거나 번외 편을 쓰는 것이다. 나림 이병주는 ‘바람과 구름과 비’ 10권을 썼지만 동학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었다. 정신적 지도자의 변절에 대해서도 한마디하고 싶었다. 자신의 변절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그 변명을 들어보고자 했다. 처음엔 도중(道衆 동학인이 대중을 이르는 호칭)을 속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기만하는 그 흐름을 따라서 가 보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전투 장면을 그린 역사 기록화이다.
이용구(1868-1912)는 문제적 인물이다. 22세에 동학에 입교한 그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고제(高弟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였으며, 3대 교주 손병희에게 경전 ‘용담유사’ 아홉 구절을 딴 ‘용구’란 이름을 37세에 하사받았을 정도로 신심 깊고 리더십 갖춘 지도자였다. 조정의 탄압과 일본의 방해에도 포교에 목숨 걸었던 맹장이었다. 그러다가 전략적으로 용일(用日 일본을 활용·이용함)하자는 손병희 교주의 명에 따라 위장 친일하다 어느 순간 자가당착 논리를 세워 신념형 친일을 한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돕고, ‘정미칠적’의 대표 송병준과 의기투합해 일진회 회장을 맡는다. 한일병합 청원을 제창하며,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 장례 날 독립문에서 추도식을 연다. 만주에 교도들을 이끌고 가 한국과 일본의 대등 합병을 선양하겠다며 가쓰라 다로 수상에게 거금의 활동 자금을 청원한다.

300만 원을 요구하는 이용구에게 가쓰라는 3000만 원이라도 기꺼이 내겠다고 호언하더니, 나눠 쓰라며 15만 원을 주고는 한일병합 1주일 만에 일진회 해산을 명령한다.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 토사구팽당한 것이다. 이용구는 귀족 작위도 거절하고, 자책과 허망에 빠져 결핵 요양하며 일본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우인(友人)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 했다.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닐까”라고 유언했다. 과연 이용구는 누구에게 속은 것일까.

나림의 결론은 “이용구는 이용구 자신에게 속은 것이다. 이용구에게 결정적인 적은 바로 이용구 자신이었다”이다. 다만 나림 체질상 “그의 시체에 더 이상 매질은 하지 말자” 주의다. 그럼에도 “그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를 욕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욕할 수 없기 때문이다”의 심정이다. 나림이 단편 ‘소설 이용구’(장편소설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에 함께 수록)를 쓴 건 무릇 악인의 말에도 들어둘 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꿈은 원대하였으나

나림 이병주가 단편으로 쓴 ‘소설 이용구’의 실제 모델인 일제강점기 인물 이용구의 사진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은 노하고 땅은 토라지고 대기는 인간의 악의로 가득한 그런 곳 그런 시대가 역사상에 더러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악의가 이 나라를 휩쓴 적이 있었다. 그 악의의 회오리 속에서도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사람들은 애써 살았다. 이 사람 이용구도 그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의 하나다. 이용구는 우필 상옥 만식 대유 해산 봉암 등 10개 이름을 썼다. 한 사람이 44년 길지 않은 생을 살며 이처럼 많은 이름이 무슨 까닭으로 필요했을지, 나림은 아마 가시덤불과 유관한 사정이 아닐까 하고 짐작한다.

이용구는 공주 전투에서 다쳤다. 공주 전투는 동학에 불가피했지만 무모한 싸움이었다. 불가피했다는 건 동학군 1차 봉기 승리 후유증 때문이고, 무모했다는 건 농민 봉기를 진압하려고 청군과 일병을 부른 고약한 조정 탓인데, 구체적으로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이 정부군과 합세해 참전한 탓이다.

1894년 1월 탐관 조병갑을 내쫓고 고부군을 점령한 이후 파죽지세로 호남 전역을 석권하고 전주성을 접수한 동학군은 6월에 정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는다. 그 내용이 개혁을 넘어 혁명적이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백정 기생 무당 광대 등 칠천인(七賤人) 대우를 개선하며,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는 조항은 시대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를 엄벌하고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치한다는 조항도 봉기의 명분이니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잡세 부과를 폐하고, 일체 공사(公私) 채무를 포기하며, 토지를 평균 분작한다는 조항은 매우 도전적이다. 이에 더해 전라도 53주에 집강소를 설립하여 관청과 함께 폐정개혁에 착수했고, 지방관이 도주한 곳에선 아예 행정기관을 대행했다. 이른바 거버넌스 구상인데, 동학은 진보적이고 큰 꿈에 비해 상황 판단은 너무 나이브했다. 조선 조정은 그런 경장(更張)을 해낼 역량과 의지가 없었다.

■외세를 끌어들인 끔찍한 판단

조정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군을 불렀고, 10년 전 청일이 맺은 천진조약을 내세워 일군도 군함과 육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청일은 풍도에서 충돌하고, 성환에서 크게 싸웠으며, 평양에서 결판을 냈다. 일본이 대승했다. 기세등등 일군이 정부군과 동학을 궤멸하려 남하하는 위급 상황에 동학은 전봉준을 총지휘로 10만여 명이 모여 2차 봉기했다. 이용구도 청주 접주로 2000명을 모아 참전했다. 일본의 무기와 전술을 농민군의 투지만으로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용구의 일본에 대한 공포 감정이 이 패주의 시간에 심어진 것일 수 있다.

3년여 도주하고 은신하며 이용구는 포교에 힘썼다. 동학의 유불선 삼교일치 교리를 가르치고, 시천주의 의미를 설파했다. “수운 선생은 유(儒)는 인륜을 밝혔으나 현리(玄理)에 도달하지 못했고, 불(佛)은 묘법에 통했으나 궁극엔 적멸에 들 뿐이며, 선(禪)은 청허(淸虛)를 지키되 세간엔 무용하다고 갈파했다”고 하며, 사람이 곧 천이며 천이 곧 사람이란 교리를 전도했다. 형상 있는 것을 사람이라고 하고 형상 없는 걸 천이라고 한다. 천주는 우리 자신 속에 있으며, 자신 속에 있는 천주를 소중히 하는 게 곧 시천주다. 이용구는 주문 시 잠언을 종횡으로 구사하며 회중을 인도했다.

이용구는 체포됐으나, 우필이란 가명이 살렸다. 접주 시절엔 상옥이었으나 갖은 고문당하면서도 그 이름을 대지 않았다. 극단의 극기로 4개월 만에 석방돼, 다시 포교에 나섰다. 동학에 우호적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동학이 가르친 게 두 가지다. 옳은 일 하면 이 나라에선 맞아 죽는다. 이 나라는 도저히 자주적으론 해 나갈 수 없다.” 교주 손병희는 10년 기한으로 미국 등에서 세계 문명 공부하며 교세를 확장하기로 하고 이용구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진보가 충격이었다. 좋건 나쁘건 먼저 일본 발전의 비밀을 알고자 했다. 처음엔 위장 친일이었으나 이용구는 점차 일본을 존숭하는 마음이 생겼다. 전환의 구실을 찾던 이용구에게 다루이 도기치의 ‘대동합방론’은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김옥균도 정독한 책이다.

이용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롤모델로 조선·일본의 대등한 합방을 구상한다. 여기 매국노 송병준이 끼고, 중국 혁명가 쑨원을 지원하고 필리핀 독립운동가 아기날도를 응원하는 대아시아주의자 우치다 료헤이가 합류한다. 진정성과 사심이 섞이고, 연명의 구실, 대의명분, 야심이 뒤엉킨 대목이다. 동학은 반일 천도교로 바뀌고 친일 이용구를 축출한다. 이용구는 시천교를 창립해 교주가 된다.

■묘비명을 떠올리다

나림이 즐겨 인용하는 백거이의 시가 있다. 제목은 ‘태행로(太行路)’. 마지막 대목이 이렇다. “행로난(行路難), 부재수(不在水), 부재산(不在山), 지재인정반복간(只在人情反覆間).” 인생길 어려움은 물 탓도 아니고 산 탓도 아니며 그저 사람 마음의 변덕질 탓이다. 참으로 그렇다.

나림은 이용구 삶을 정리하며 악인의 들어둘 만한 말로 “인생막불탄무상(人生莫不呑無常)”을 예로 들었다. ‘인생길, 무상을 삼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덧없는 세월, 우리는 모두 한 조각 바람일 뿐이다. 다만 같은 한 조각이라도 그 바람이 향기일 수도 악취일 수도 있다는데 삶이 두려운 것이다. 에피타프(Epitaph 묘비명)를 앞에 두면 누구나 겁난다. 록 그룹 킹 크림슨이 부른 명곡 ‘에피타프’ 한 구절이다. “Confusion will be my Epitaph.(”내 묘비명은 ‘혼란’이라고 새겨질 것이다.) 비(碑)에 새길 글이 그저 혼란 한 글자라면 그건 비감(悲感)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碑)’ 타이틀의 의미를 나는 나림의 번외 편 ‘소설 이용구’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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