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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의 한 장면. |
1973년 말기 암을 앓는 베테랑 CIA 요원 크리스(존 말코비치)와 그의 오랜 동료이자 제자인 리(샘 록웰)는 칠레의 지국장 MJ(스티브 부세미)의 지시로 태평양의 외딴 낙원 이스터섬으로 파견된다. 은퇴를 앞두고 회고록을 준비하는 크리스와 상관에게 그를 감시하라는 밀명을 받은 리는 서로 속내를 감춘 채 섬에 도착하게 된다.
거대한 모아이 석상이 늘어선 섬에서 두 사람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현재의 음모가 얽히는 상황에 직면한다. 특히 크리스가 섬에서 만난 칠레 대학생과 가까워지면서 이들의 여행은 예상치 못한 혼란과 위기로 치닫는다.
시니컬한 대사와 그에 걸맞은 블랙 코미디, 극작가 출신다운 연극적 연출은 마틴 맥도나의 장기다. ‘와일드 호스 나인’은 그의 장점이 여전히 빛나는 작품이다. 도무지 존경할 구석이라고는 없는 인물인 크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영화는 정치적 음모와 죄책감 등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다.
크리스는 시종일관 불쾌한 말을 쏟아낸다. 덕분에 이를 보던 관객도 영화 속 인물들처럼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그의 막말에는 묘한 진심이 느껴진다. 포장이나 겉치레, 진실을 숨기기 위한 거짓과 기만의 술책이 없기 때문이다.영화에서 기밀은 좀처럼 지켜지지 못한다. 크리스는 자신이 CIA 요원이며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것도 CIA라고 천연덕스럽게 떠벌린다. 덕분에 다른 작품이었다면 비밀스럽게 다뤄졌을 그들의 정체는 스릴러의 요소로 활용되지 못한 채 손쉽게 밝혀진다. 이러한 구조는 영화의 배경인 이스터섬의 풍경과도 닮았다. 이 섬에는 모아이 석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 이 공간에서 거짓과 기만은 환한 태양 아래 밝혀지게 된다.
이 허허실실한 영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배우들의 호흡이다. 마틴 맥도나가 차려놓은 무대 위에서 존 말코비치가 괴악한 농담을 던지면 샘 록웰이 마치 하나의 만담처럼 받아낸다. 덕분에 평소라면 경악할 만한 대사도 두 배우 사이에서는 유쾌한 농담이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존 말코비치의 연기다. 형편없는 인간으로 시작해 기어코 회한에 잠긴 외로운 남자를 완성하는 눈빛과 얼굴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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