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menu search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시간여행 성지 ‘레트로 힙’ 통영

김태훈 기자 hiro@kookje.co.kr | 2026.04.15 18:35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엑스
넘실대는 푸른 바다와 수산시장의 활기가 어우러진 강구안, 벽화로 가득한 집이 빼곡한 언덕마을 동피랑, 도시 전체를 음악으로 물들이는 통영국제음악제까지. 통영은 봄과 가장 잘 어울리는 국내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하지만 잘 알려진 명소만으로 통영을 다 봤다고 말하기 어렵다. 강구안 건너 작은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면 관광 엽서 속 통영과는 또 다른 신선한 풍경이 펼쳐진다. 오래된 분식집과 레코드점, 근대 건축물과 청년들의 감성이 가득한 새로운 공간들, 조선시대의 역사가 스민 장소까지 한 도시 안에 겹겹이 쌓인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올봄에는 익숙한 풍경 너머 통영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경남 통영시 항남1번가가 레트로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항남1번가길 일대에서 연 ‘힙행당 삼끼골목파티’ 행사 모습. 통영시 제공
◇ 오행당 골목 : 빛바랜 골목풍경, 다시 사람을 불러 모으다

강구안(경남 통영시 중앙동) 맞은편 ‘항남1번가길’은 이곳 토박이들에게 ‘오행당 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이는 오래전 이 골목에 자리했던 한의원 ‘오행당’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200여m 길이의 이 골목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통영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골목 가득 상가가 빼곡히 들어서 ‘통영의 명동’ 혹은 ‘통영의 남포동’이라 불릴 만큼 북적였다. 세월이 흐르며 유동 인구가 줄고 골목도 쇠퇴해 지금은 문을 닫은 가게가 대부분인 구도심의 풍경으로 남아 있다.

30여 년째 항남1번가에서 영업 중인 분식집 ‘클우동’. 김태훈 기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멈춘 듯 남겨진 간판과 오래된 점포들, 바랜 색감의 골목 풍경이 레트로 열풍을 타고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SNS에 추억의 레코드점과 분식집, 사진관 등을 다녀온 후기가 올라오는가 하면, 최근에는 청년 소상공인들이 연 카페와 바, 빈티지 옷 가게 등이 하나둘 빈자리를 채웠다. 지난해 11월에는 인근 청년 상인들이 주축이 돼 패션과 굿즈, 먹거리 팝업, DJ 리스닝 파티 등을 선보인 ‘힙행당 삼끼골목파티’가 열려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라면 열에 아홉은 분식집 ‘클우동’을 찾는다. 클우동은 1990년 중순부터 2000년대 초 분식 프랜차이즈 열풍 속에 등장한 브랜드이다. 세월이 흐르며 대부분의 매장이 사라진 지금, 전국에 남은 점포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중 이곳은 30여 년간 골목 한편을 지키며 오행당 골목의 대표적인 인증 명소가 됐다. 가게에 들어서면 파란색 ‘클’ 로고부터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인테리어까지 모든 것이 마치 2000년대 초반에 멈춰 선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골인 인근 상인은 물론 “예전에 이런 집 많았는데”라며 추억을 더듬는 관광객의 발길도 이어진다.

항남1번가길에 자리한 음반 판매점 ‘명성레코드’. 김태훈 기자
이곳의 대표 메뉴는 단연 우동과 김밥이다. 다만 요즘 흔한 가쓰오부시와 쯔유의 감칠맛이 강한 일본식 우동과는 결이 다르다. 담백하고 심심한 그 시절 휴게소 가락국수에 가까운 편안한 맛이다. 김밥 역시 화려한 재료 대신 기본에 충실한 맛을 고수한다. 주변 테이블에서 유독 많이 눈에 띄는 메뉴는 ‘비빔만두’였다. 대구식 납작만두에 채 썬 채소를 올리고 새콤달콤한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 음식인데 이 집의 별미로 통한다.

골목의 또 다른 명소는 ‘명성 레코드’이다. 이곳은 통영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약속 장소’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할 때면 “명성레코드 앞에서 보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가게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가게 안에 들어서면 큼직한 스피커와 각종 음향 장비, 벽면을 빼곡히 채운 CD와 LP 재킷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방탄소년단(BTS)과 NCT, 뉴진스 같은 최신 가수의 음반부터 나훈아 조영남 전인권의 추억의 음악, 비틀스와 퀸, 마이클 잭슨 같은 고전 팝까지 장르와 세대를 가리지 않고 품고 있다.


◇ 통영 근대역사길 : 김상옥 시인과 근대 건축물들의 향기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운영하던 ‘대흥여관’을 리모델링한 ‘통영 근대 사진 전시관’. 김태훈 기자
시계를 조금 더 과거로 돌려보자. 항남1번가길에는 오행당 골목 말고도 최근 ‘통영 근대역사길’이라는 별칭이 더해졌다. 통영시는 현재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아 항남동과 중앙동 일대 1만4000㎡를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시는 우선 항남1번가길에 ‘통영 근대역사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 모인 4곳의 근대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지난 2월 공개했다. 여기에는 통영이 낳은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1920~2004)의 생가도 포함됐다. 김상옥은 시와 서예, 그림에 두루 능한 예술인이다. 교과서에 실린 시조 ‘봉선화’를 비롯해 서예와 문인화 전각 도자기 등 여러 분야에서 족적을 남겼다.
김상옥 생가는 1936년 지어진 목조 구조의 지상 2층 건물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곳은 정비를 거쳐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1층은 ‘초정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꾸며졌다. 김상옥의 생애를 따라가는 연대기 전시를 비롯해 도자기와 서예 작품, 생전 사용했던 유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턴테이블 모양을 본뜬 뮤직 플레이어였다. 윤이상의 ‘그네’와 ‘편지’, 김세형의 ‘옥저’, 금수현의 ‘꽃으로 그린 그림’ 등 김상옥의 시에 곡을 붙인 음악을 들려줘 그의 문학을 눈으로만이 아니라 귀로도 감상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연탄보일러 아궁이와 화장실 등 옛 생활 흔적도 일부 원형대로 남겨둬 당시 생활상을 엿보는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김상옥 생가’ 2층에 마련된 김상옥의 작업공간 모습. 김태훈 기자
2층은 ‘초정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구성됐다. 김상옥이 작업하던 책상과 옛 부엌 모습 등 그의 생활 공간을 엿볼 수 있다. 이중섭 윤이상 이어령 등 당대 문인, 예술가들과의 인연과 일화를 담은 전시도 마련돼 그의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운영한 여관으로 알려진 ‘통영 구 대흥여관’은 통영의 근대 도시 경관을 소개하는 ‘통영 근대 사진 전시관’으로 새단장했다. 일제강점기를 포함해 1900년대 통영의 근대 도시 경관과 생활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밖에 1940년대 숙박시설로 활용됐던 ‘동진여인숙’은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로, 1936년 건립된 목조 가옥으로 보존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온 ‘김양곤 가옥’은 카페 ‘통영다방’으로 탈바꿈했다. 근대 사진 전시관 바로 옆에는 ‘통영 근대 역사 안내소’가 설치돼 장소에 대한 설명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삼도수군통제영 : 근대와 1990년대 지나 조선시대로

벚꽃이 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전경. 김태훈 기자
근대의 시간을 지나왔다면 이번엔 조선시대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항남1번가길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통영의 뿌리를 품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하고 있다. 1605년(선조 38년) 세워진 이곳은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정무를 보던 일종의 지휘 본부였다. 통영이라는 지명 역시 여기서 유래했다.

통제영은 중심 건물인 ‘세병관’을 비롯해 통제사의 집무 공간인 ‘운주당’과 ‘경무당’, 참모장 격인 우후가 근무하던 ‘중영’ 등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고즈넉한 한옥 건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은 한국 특유의 단아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자랑한다. 특히 봄이면 전통 건축의 고풍스러운 멋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어우러져 봄 산책 명소이자 벚꽃 명소로도 사랑받는다.

통제영 입구에 자리한 ‘통영 12공방 전통공예품 전시판매장’도 빼놓을 수 없다. 통제영은 전국 각지의 장인들을 통영으로 불러들여 각종 군수품은 물론 진상품과 생활용품까지 직접 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통영의 공예품은 정교하고 뛰어난 품질로 최상품으로 인정받았다. 전시판매장에는 누비로 만든 가방과 지갑, 나전칠기, 통영소반, 통영부채 등 실용성과 미감을 두루 갖춘 공예품을 만날 수 있다. 기념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통영 장인 정신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엑스
관련기사
국제신문 뉴스레터

[많이 본 뉴스]

[창간기획] 낙동강 하구 0.9℃의 경고

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