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보다 더 뜨거워라…100일을 붉게 불태울 밀양 ‘선비정신’ 피었네
밀양 배롱나무(백일홍) 기행
김성효 선임기자 kimsh@kookje.co.kr
| 2026.08.0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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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밀양시 표충사의 배롱나무. 뜨거운 여름에 더 화려하게 핀 꽃이 절과 잘 어우러져 밀양을 대표하는 배롱나무 명소로 꼽힌다. 김성효 선임기자 |
- ‘호국성지’ 표충사 경내 곳곳이 선홍빛
- 돌담 따라 흐르는 꽃물결·고요함 조화
- 도심 속 혜산서원 270년 시간 품은 곳
- 특이하게 ‘하얀’ 배롱나무도 볼 수 있어
- 자연과 정자가 하나된 오연정·월연정
- 밀양향교, 정숙하고 절제된 기품 절정
■천년고찰 품격 돋우는 표충사 배롱나무
밀양 배롱나무 기행의 첫머리는 영남 알프스의 명산, 재약산 자락에 안긴 표충사에서 시작한다. 사명대사의 호국광풍이 서린 이 호국성지는 여름이 되면 경내 곳곳이 선홍빛으로 물든다.
일주문을 지나 천천히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짙푸른 숲이다. 그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붉은 꽃송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단청 위로 늘어진 꽃가지, 돌담을 따라 흐르는 분홍빛 꽃물결은 절집 특유의 고요함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특히 대광전 앞마당은 표충사의 대표적인 촬영 명소다. 삼층석탑 뒤로 배롱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기와지붕 너머로 재약산 능선이 이어진다. 재약산의 짙푸른 녹음이 배경막이 되어주어 꽃의 붉은 색감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찰 특유의 적막함 속에서는 오히려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70년 시간을 품은 혜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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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산서원 |
여름의 밀양 혜산서원은 배롱나무가 가장 먼저 여행자를 맞이한다. 휘어진 소나무가 지키는 입구를 지나면 붉은 꽃이 기와지붕과 담장을 물들이며 고즈넉한 서원의 풍경을 선사한다. 이곳에는 특이하게 하얀 배롱나무 꽃도 볼 수 있다.
혜산서원은 1753년(영조 29년) ‘서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조선 전기 학자 손조서를 기리기 위해 창건됐다. 지역 유림이 학문을 익히고 선현을 추모하던 곳이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긴 세월 폐허로 남아 있다가 지역 유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복원되면서 오늘의 혜산서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원은 굴곡의 역사를 겪었지만 마당의 배롱나무는 해마다 여름이면 변함없이 꽃을 피운다. ‘백일홍’이라는 이름처럼 긴 시간 붉은 꽃을 이어가는 모습은 시련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서원의 역사와 닮았다.
■선비의 풍류 즐기는 오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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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연정 |
오연정의 진짜 매력은 정자에 오르는 순간 시작된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멀리 산줄기는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 풍경 위로 붉은 배롱나무 가지가 길게 드리워진다. 자연과 건축, 그리고 꽃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어느 한 요소도 앞서지 않는다.정자 곁에 선 배롱나무는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거칠게 갈라진 나무껍질은 수십 년의 시간을 말해주고 줄기는 오랜 풍상을 견딘 흔적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지 끝마다 탐스럽게 피어난 꽃은 노목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생기가 넘친다. 아마도 조선의 선비들도 이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을 것이다.
오연정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다. 화려한 조명도, 북적이는 상점도 없다. 대신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와 오래된 정자가 품은 시간이 있다. 그래서 이곳은 걷기보다 머무는 여행이 더 잘 어울린다.
■자연과 조화 이룬 정원, 월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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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연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 선생이 추화산 아래 월연대에 지은 정자다. 월영사 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세웠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지은 두 채의 건물 중 북쪽 절벽 위는 월연대, 남측은 쌍경당이라 했다. 응천 상류인 이연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고, 휘영청한 달이 중심을 비추면 물과 달이 쌍으로 맑게 보이는 절경에서 이름을 따왔다. 특히 모든 건물이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의 기능을 하면서 각기 다른 형태로 지어져 흥미롭다.
이들 건물 외에 탄금암 쌍천교 등의 유적과 백송 오죽 등의 희귀한 나무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한그루 남은 백송이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밀양강의 물줄기가 낡은 기와 건물과 한데 뒤섞인 가운데 피어난 배롱나무꽃은 한국 정원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
■한옥과 붉은 꽃잎의 조화, 밀양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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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향교 |
향교의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명륜당과 대성전 앞마당을 굳건히 지키고 서 있는 배롱나무와 마주하게 된다.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공간답게 이곳의 배롱나무는 화려함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정숙하고 절제된 기품이 느껴진다. 세월의 때가 묻은 기둥과 하얀 창호지 문 너머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 분홍빛 꽃가지는 한국 전통 미학의 정수인 ‘여백과 절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향교 내 작은 어린이도서관에서 잠시 땀을 식힐 수 있다.
배롱나무는 한 번 피고 금세 지는 여느 꽃과 달리, 새로운 꽃이 계속 피어나며 한여름 내내 아름다움을 이어 간다. 보통 7월 중순 피기 시작해 8월 중순에 절정을 이룬다. 가장 풍성하고 싱그러운 꽃 상태를 보려면 8월 초에 찾아가는 것이 좋다.
백일홍 사진을 잘 찍고 싶다면 햇볕이 강한 한낮에는 붉은 색감이 날아갈 수 있기에 부드러운 빛이 드는 시간대인 아침저녁을 권한다. 도보 이동이 많아 편안한 신발과 햇볕을 막아 줄 시원한 생수, 손수건 준비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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