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국제공항에서 조류퇴치에 여념이 없는 공군의 BAT 대원들.

'버드 스트라이크를 막고 공항을 사수하라'.

새떼의 출몰로 아수라장이 된 공항. 결국 활주로는 폐쇄되고 국제공항은 마비된다. 해결책으로 나스카 문양처럼 활주로 바닥에 거대한 맹금류 그림을 그려 새떼를 쫓아내고 공항은 안정을 되찾는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에어시티'의 한 장면이다. 다소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비행기와 새의 상극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폭염 특보가 내려진 지난 16일 김해국제공항에서 새떼와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


●…악당 아닌 새 잡는 군인 '배트맨'

공군 제5전술공수비행단의 조류퇴치반 '배트(BAT·Bird Alert Team)'. 14명의 부대원이 2개조로 나눠 일출부터 일몰까지 365일 새떼로부터 항공기의 안전을 지키는 숨은 파수꾼이다. 부르기 쉽게 '배트맨'으로도 불린다. 김해국제공항은 민간·군용 항공기가 같은 활주로를 사용하고 있어 조류퇴치 업무는 공군에서 거의 도맡고 있다.

배트의 주역할은 항공기가 뜨고 내릴 때 '버드 스트라이크(항공기와 조류의 충돌)'가 생기지 않도록 활주로 밖으로 새들을 몰아 내는 것. 새들과 대화가 통할리 만무해 새를 강제로 쫓아내려면 꽤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퇴치장비로 과거 꽹과리나 징 등이 주로 동원됐지만 근래들어 '첨단 무기'가 속속 보급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몇 분 간격으로 폭발음을 터트리는 자동폭음기와 새들이 가장 싫어하는 8가지 음향을 내보내는 A/V알람기. 그밖에 활주로 녹지대 곳곳에 마네킹과 바람 따라 움직이는 '스카이 댄서(거리의 홍보용 풍선 인형과 유사)'가 설치돼 새떼를 분산시킨다.

하지만 이런 고정식 장비는 새들의 학습효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다. 결국 사람이 현장에서 직접 새를 내쫓는 게 확실한 해결책. 대원들에게 로켓형 폭음탄과 공포탄이 장전된 엽총이 지급되고 반장 등 책임자는 긴급시 실탄(산탄)으로 새를 사냥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이 정도면 새들과 전쟁을 치르는 것 맞죠?"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공항 주변은 말 그대로 새들의 낙원. 동쪽으로 낙동강 하구를 끼고 남쪽은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 서쪽에는 광활한 김해 평야와 주남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이 가운데 새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곳이 공항 활주로의 녹지대. 항공기의 불시착이나 궤도 이탈에 대비, 완충 역할을 위해 활주로 옆으로 초원같은 자연 녹지대가 조성되어 있다.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는 데다 규정상 녹지 공간을 관리하기 때문에 먹잇감이 풍부해 평소에도 온갖 잡새들이 모여든다. 녀석들에겐 일종의 '먹자골목' 같은 곳이다.

새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즌은 한여름철. 항공기 안전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여름 철새인 백로와 왜가리다. 특성상 무리지어 움직이는 데다 행동이 원체 굼떠 비행기가 다가와도 달아나지 못하고 곧장 부딪히기 일쑤다. 더욱이 비행 고도가 항공기 이착륙과 맞물리는 500피트 안팎. 개체수도 가장 많아 하루 평균 500마리, 많을 때는 1000마리 이상이 날아든다. 배트맨들의 타도 대상 1호에 올라있다.


●…승자 없는 지루한 싸움전투화에 얼음조끼, 엽총을 둘러메고 지프를 타고 전장(활주로)으로 나섰다. 배트팀이 사수하는 구역은 길이 3.2㎞·너비 60m의 활주로 두 곳. 새들이 많다 해도 활주로가 워낙 광활해 수시로 차를 세우고 새를 쫓아야 한다.

요란한 사이렌에 무전기로 다급하게 떨어지는 관제탑의 지시 사항. 곳곳에서 진동하는 폭약소리. 기자도 지급 받은 엽총에 공포탄을 장전하고 잇따라 방아쇠를 당겼다. 공포탄이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서 '펑' 하며 터지자 혼비백산 흩어지는 백로떼. 어느새 몸에는 비릿한 화약냄새가 배었다.

하지만 승전보는 그때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달아난 줄 알았던 새떼들이 저만치 자리를 옮겨 다시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 이건 영악한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힘든 거는 둘째치고 짜증나서 못 살겠습니다. 쫓으면 돌아오고 쫓으면 또 돌아오고…." 11년째 김해공항에서 배트를 지휘하는 이상우 (원사·53) 반장의 푸념이다.

새들이 가장 왕성할 때가 비가 내리기 직전이라고 한다. "지렁이 등 벌레를 잡아 먹느라 활주로는 백로떼로 하얗게 보일 정도입니다. 이런 날엔 대원들이 다가가도 아예 달아날 생각을 안 합니다."

학습효과 때문에 자동폭음기 같은 고정 장비는 새들에겐 무용지물이 된 상황. 이러다보니 조류퇴치반과 새들의 쫓고 쫓기는 지루한 숨바꼭질이 하루 일과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배트 차량의 하루 이동거리가 200㎞에 달한다고 하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또 다른 복병, 더위와 비행기

그늘 한점 없는 삭막한 활주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지열 사이로 굉음을 내며 항공기들이 뜨고 내리는 게 장관이다. 이날 부산의 기온은 32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의 지열이 더해져 활주로의 온도는 40도를 오르내렸다. 얼음조끼가 흐물흐물해 진지 이미 오래. 차안은 에어콘을 틀어 놓아도 숨이 턱턱 막혀 온다.

신속한 조류퇴치를 위해 대원들이 이용하는 차량은 차양막 없는 4륜 오토바이. 긴팔에 안전헬멧, 방진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달궈진 활주로를 누빈다. 한증막 속을 달리는 것과 같다.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인데, 사진 촬영 때 어느 대원은 "드디어 신문에 데뷔하게 됐다"며 싱글벙글이다.

살인적인 더위 외에 대원들을 긴장시키는 게 항공기의 이착륙이다. "간혹 업무에 열중하다 보면 활주로에서 비행기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간담이 서늘합니다." 김해공항에 뜨고 내리는 운항 편수는 하루 200여 회(80% 이상이 민간항공기이다). 아차하면 걷잡을 수 없는 대형 사고가 초래된다. 따라서 활주로 진입과 유도로 이동 시에는 반드시 관제탑과 교신해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날 하룻동안 공포탄 316발, 로켓탄 116발, 실탄 34발을 소진했다. 전쟁터가 따로 없다.

365일 이런 생활을 하면 날개 달린 새들이 징그럽지 않느냐고 대원들에게 묻자 "그래도 음식 중에 치킨을 가장 좋아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

글자 그대로 조류와 비행기의 충돌을 뜻한다.

항공기 동체와 부딪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착륙 도중 새가 엔진에 빨려 드는 게 가장 치명적이다. 특히 이륙 과정에 이런 버드 스트라이크가 생기면 엔진 파열로 비행기의 양력이 떨어져 추락 사고로 이어진다.

국내에는 한해 70여 건의 크고 작은 버드 스트라이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피해액이 매년 20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