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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창작의 동맥경화

조재휘 영화평론가 | 2025.02.19 19:15
기업 경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비용을 감수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생태계를 건강하게 해 지속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길. 그리고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업계의 건전성을 무너뜨리지만, 지금 당장 큰 이익을 빨아들이는 길. 만약 선택지를 받아 든다면 상식적으로는 전자가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상황은 대개 후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한 장면.
공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임이 분명함에도, 윗선은 그릇된 선택을 내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다수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정작 이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똑같이 망치길 거듭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건 사회적 가치와 비즈니스적 가치의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단순한 재무 이익의 증대에 몰두하라는 모종의 압력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계가 극심한 부진과 침체의 늪에 처해있던 코로나 때, 게임업계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팬데믹 국면에서 빠져나온 지금 비디오 게임 산업은 연이은 제작 스튜디오의 폐쇄와 축소, 인원 감축으로 급격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여러 각도에서의 접근과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짚어보고 싶은 건 참신함과 다양성, 웰메이드의 실종이다.

소니는 ‘라스트 오브 어스’와 ‘호라이즌 제로 던’ 같은 기존작의 리마스터나 리메이크를 잇따라 발표했지만 주목할 신규 IP는 없었다. ‘콘코드’로 라이브 서비스에 진출하려 했지만 기록적인 실패만 맛보고 추진 중인 프로젝트 다수를 접기에 이르렀다.
오픈 월드 게임 같은 동시대의 대세, 검증된 기획의 안이한 재탕은 껍데기만 다른 몰개성한 게임만을 양산해 냈다. 피로를 느낀 유저들은 질적으로 퇴보하고 가격까지 오른 신작에 더 이상 지갑을 열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스튜디오들은 갈수록 부풀어가는 제작 비용 회수에 골몰한 까닭에 내부적으로 여러 아이디어를 기각시키고 안전한 공식만 답습하려는 ‘창작의 동맥경화’에 이르렀다.

어디선가 먼저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면, 맞다. 주어를 바꿔본다면 이건 한국 영화 산업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창조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최소한의 지반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를 일체 외면하고 달려온 끝에 마주한 파국이 바로 제작에 들어간 영화가 없다시피 하고 불황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2007)의 실망스러운 리메이크에 더해, ‘어쩔 수가 없다’(2025)와 ‘파과’(2025) 정도를 제하면 그다지 관심을 끌 만한 기획이 실종되다시피 한 라인업은 메인 스트림의 창조성 고갈이 문화예술의 저변뿐 아니라 산업의 지형까지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입증한다.

익숙한 공식이 한계에 달했고 비즈니스 모델이 파괴될 지경이 됐다면 이제 전환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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