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전날까지 눈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햇살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미처 눈치채지도 못한 새 봄이 왔다. 그런데 봄이 그냥 온 것은 아니다. 영국 시인 테드 휴스는 그의 시 ‘칼새(Swifts)’에서 봄이 되어 돌아오는 새를 보며 “지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봄이 돌아온 것은 지구가 작동하며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염되고 파괴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제 역할을 다해내는 자연의 모든 것 덕분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세상의 봄이 오도록 할 수 있을까? 분열된 이 세계가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자리와 역할은 무엇인가? 여전히 인문학과 책과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

이 질문에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는 시간들이다. 상식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그것도 거의 매일 일어나다 보니 희망과 정의 같은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모든 것이 돈으로 가치매김 되고, 돈이 모든 권력을 잡은 것 같은 세상에서, 지금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을 지키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의심이 들 때도 많다. 의심의 수준을 넘어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어려운 시절이다.

이런 생각에 무력함마저 드는 어느 날 동료가 기사 하나를 소개했다. 지난해 10월 영국 유력지 ‘가디언’에 난 기사였는데,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작은 독립 출판사의 중요성에 대한 증거’라는 제목이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한강 작가의 수상이 한국 문학의 중요한 성과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작품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어려운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작은 출판사들의 영향력이 중요함을 일깨웠다는 내용이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영국의 독립 출판사 ‘포르토벨로 북스(Portobello Books)’에서 처음 번역돼 출간됐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꼭 전해야 할 주제를 담은 책들을 영어권에 소개해 ‘전 세계 작가들의 고향’이 되고자 했던 이 작은 출판사는, 폭력에 끝까지 저항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채식주의자가 번역된 이듬해 한강은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202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형 출판사들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소설을 작은 독립 출판사가 출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사를 읽고 불현듯 작지만 위대한 존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보이지 않더라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어떤 일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왜 그 일을 하는가? 돈이 되지 않아도, 당장 쓸모없어 보여도, 왜 그 일을 계속하는가?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태양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더라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것이 살아 있으므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듯,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돈을 벌 수 있더라도 아이들에게 입시 경쟁에서 이기는 법만 가르칠 순 없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짓을 말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발언을 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폭력은 용인할 수 없다. 이 당연한 것들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려운 시대다. 하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도 서로를 보살피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내야 하는 역할들을 묵묵히 해내는 무수히 많은 작고 위대한 존재들이 이 세계를 지켜내고 있다. 그러므로 무력할 수 없다. 지금 이곳에서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꽃을 꺾을 수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봄이 봄다워지는 것은 결코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고 끝끝내 해내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존경과 격려의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나 역시, 희망은 살아 있는 자의 의무임을 잊지 않고 더 치열하게 살아내겠다. 그것이 내 삶이 제대로 작동할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