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구병모 장편소설 ‘아가미’ 초판 ‘작가의 글’ 중 한 문장이다.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인간이 세상을 혼탁하게 하고 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시대와 일상을 모두 뒤흔들 기세다. 그리고 이 소용돌이를 멈추고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보통 사람의 연대가 다윗처럼 맞서고 있다. 이들은 은박담요를 쓰고 응원봉을 들고, 아니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연대의 힘을 만들어낸다. 광장은 시공간을 넘어서 연결된다.

특별한 건축이 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에 대한 기대이다. 대가라 칭송받는 건축 신들의 창조 퍼포먼스가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특별함이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기꺼이 허리를 숙여 보통의 삶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화려한 프레젠테이션과 유명한 이름값과는 달리 특별함과 보통의 사이에 연결은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도시의 99%를 채우는 보통의 건축가들이 만든 보통의 건축에 기대를 가져야 한다.

보통의 건축은 오래된 역사 유산이 아니어도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 주택가의 서점, 원도심 슈퍼마켓 앞 노란 장판이 깔린 평상처럼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지역을 잇는다. 퓨전사극의 식상한 표현처럼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이어져 묶인 모습이다. 그래서 어쩌면 철거 예정 동네의, 유리창이 뽑혀 검은 눈을 가진 주택들에서 붉은 실이 끊어져 버린 나를 발견한다.

내가 좋아하는 부산 중앙동의 원도심은 ‘또따또가’라는 예술인들의 활동 영역이 있다. 관용과 배려, 문화적 다양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똘레랑스(tolerance)’에서 ‘또’와, ‘따로 살아가지만 또 같이 문화를 공유’한다는 ‘따또’와, 길을 뜻하는 ‘가’를 붙인 명칭에서 예술가가 지역과 관계를 맺는 느슨한 연대를 떠올릴 수 있다. 인쇄소가 번성했던 이곳은 시청이 옮겨가면서 약간은 힘을 잃었지만, 여전히 많은 중소기업이 자리잡고 있고 거리 곳곳에서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크고 멋진 미술관은 없지만 공실이 많던 빌딩 곳곳에 작은 전시가 이어져, 마치 1990년대 남포동 극장가처럼 전시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또 전시를 보는 문화권이 그물망처럼 형성됐다. 그 층위를 생각해 보면, 먼저 바다가 가까운 입지와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가로수, 그리고 하늘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5층 내외의 건축물이 지역 인프라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시청이 있던 시절부터 맛집으로 유명했던 노포들과, 하늘과 나무를 선물받은 거리에서 만나는 야외 카페들이 예술가의 작품과 함께 연대해 ‘힘을 발휘한다’기보다는 가볍게 설레게 한다.

분명 바다는 바람으로만 느낄 수 있고, 특별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도 아니고, 흔한 벚꽃 한 그루 없고, 미슐랭 가이드에 오른 식당도 없지만 말이다. 이렇듯 세계 최고나 아시아 최고의 ‘강한 힘’이 아니라, 시간과 사람과 문화가 만든 작은 힘들의 연대가 가늘지만 끈질긴 붉은 실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신문이 주요 매체이던 시절 자주 오늘의 운세를 살펴보곤 했다. 운세가 이어지고 난 후에는 거의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난다’ 등으로 맺음을 한다. 이미 인생에서 귀인을 만났는지 못 알아보고 지나쳤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부산을 살릴 수 있는 귀인은 과연 있을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피란기 민중들이 얽혀 살아온 흔적이 새겨진 이 도시를 깔끔하게 해줄 세계적인 건축 귀인은 누구일까. 세계적인 문화도시라는 이름을 붙여줄 퐁피두 귀인은 얼마를 주고 모셔와야 할까. 유명 배우 귀인이나 빌보드 1위 가수 귀인이 “부산이 경이롭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정치를 비롯해 도시건축과 문화에서도 무수한 소용돌이들이 태풍처럼 만들어지고, 확장하고, 충돌하고, 세상을 뒤흔들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끝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가운데 끊어질 듯 다시 이어져 있는 너와 나 사이의 붉은 실을 찾고 싶은 것은 갱년기 탓일까. 중앙동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