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우리는 또 생각지도 않은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선거를 치르는 데 사용되는 비용만 생각해도 국민의 마음은 불편하다. 쓰지 않아도 되는 세금을 써야 할 뿐만 아니라 뻔한 공약과 선거 유세 방송에 평범한 일상을 잠시라도 저당잡히고 있다는 분노 때문이다. 12·3 계엄 이후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바는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가 아직은 갈 길이 멀고,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들이 사회 곳곳에 산적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더 선결적인 과제는 이번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된 과정에서 드러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캐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나라가 처한 총체적 위기 국면을 근원적으로 헤쳐나갈 힘과 비전은 이러한 과정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한국 사회가 처한 정신적 위기를 전환시킬 새로운 계기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이런 사태는 반복될 것이다.

정치권이 쏟아놓은 어설픈 이념들과 분쟁의 씨앗들로 이미 국민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단순한 피폐함을 넘어 그 절망의 상태를 형언하기 힘들 정도다. 12·3 사태 이후 나라 살림은 더 어려워졌으며, 그 어느 때보다 부익부 빈익빈의 골은 극심해졌다. 그런데 더 심각한 사실은 소위 지도자들이란 자들과 그들을 맹신하는 소수 추종자들의 끝모를 야만성이다. 12·3 사태 후 전개되어 온 우리 사회의 혼란상을 겪으면서 그들의 민낯은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이 야만스러움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가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이 야만스러움을 어떻게 치유해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울 것인가? 오래 전 헌팅턴과 저명한 학자들이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조사하고 그 원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들의 결론은 한 마디로 문화력이었다. 문화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제대로 성장시켰고, 문화의 힘으로 경제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 발전의 근원적 힘이 이러한 문화력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 문화력의 뿌리가 바로 정신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다. 제대로 된 정신에 기초하지 않고 피어나는 문화는 뿌리없는 나무와 같다. 무성한 잎사귀와 열매를 자랑해도 결국 뿌리없는 나무는 작은 풍랑에도 꺾이고 만다. 찢겨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분열된 정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국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의 매개체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문화이다. 가치가 상대화되고 다양성이 일상화된 현실 속에서 국가라는 임의의 공동체 구성원들을 온전히 하나로 통합시켜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윤리적 직관으로서의 양심과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신에 기초한 문화력을 통해 양식을 갖춘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믿는다. 문제는 이러한 정신을 지닌 문화력을 어떻게 키워내고 확산시키느냐 하는 점이다. 일차적인 길은 사회 곳곳에 팽배해 있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지도자들을 예외없이 공적인 장에서 치워내는 일이다. 윗물부터 갈아치우지 않으면서 아랫물이 깨끗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시에 윗물의 오염을 인지한 아랫물의 자각도 중요하다.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정신이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에 관심을 가지거나, 선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유권자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자가 시민정신의 뿌리이자 문화라고 지칭하는 것들은 비판적 사고와 공공의식, 무엇보다도 침묵하지 않는 용기와 이성과 공감이 결합된 통찰력을 의미한다. 과거 불의한 권력에 항거했던 시민정신을 역사로서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가능했던 기초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따져보고 그것을 새롭게 시민정신의 역사로서 복기·복원시켜야 한다. 민주시민의식 혹은 시민정신은 공공의 삶에 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태도와 실천의 총체이다. 시민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책임있는 자세는 책임있는 정치지도자들을 불러들인다.

“민주주의는 투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투표 이후에 시작된다.” 이번 선거가 깨어있는 시민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공공성과 문화력을 회복하는 계기이자 출발점이 되길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