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연구자 63인의 관심사
- 70편의 짧은 글들로 묶은 책
- 과거 국가조직·외교 살펴보면
- 오늘날 사회문제 해법 제시해
한국역사연구회 연구자 63인이 현재 고민하는 관심사를 70편의 짧은 글로 정리해 책으로 묶었다. 그래서 필자 생각이 완전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새롭게 과거를 관찰하고 해석한 ‘열린 글’이기도 하다. 역사 글쓰기의 산뜻한 시도 덕분에 우리는 논문이나 역사서가 아닌 싱싱하고 유익한 한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책을 잡으면 역사란 과거 골동품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작가는 말했다. “과거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과거란 현재를 끊임없이 밝혀주는 등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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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할 혜안을 얻을 수 있다. 사진은 성탄절인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연합예배에서 시리아와 예멘에서 탈출해 국내에 체류하는 난민들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증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
고려에 온 송나라 사람 채인범과 유재의 성공한 고려 정착기를 읽으면 오늘 한국이 부딪친 난민과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한 혜안을 얻을 수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고려에 인접한 발해, 거란, 여진의 수많은 사람이 고려로 들어왔다. 송나라에서 귀화한 관리는 선진문물을 전파해 정부가 파격적인 후대를 하기도 했다. 오늘 한국에서 외국인 이민자와 귀화인들이 어떤 지위와 역할을 하고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우리는 그들을 나라와 사회에 도움 되는 보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국가 조직에 관한 글에서는 국가가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어느 부서에서 맡아야 하는가를 정하거나 사람을 우선해 누가 잘 처리할 수 있는가를 먼저 따지는 방법이다. 조선은 전자 방식을 택해 화포를 만들려면 병조가 주무부서가 되고 병조의 좌랑-정랑-참의-참판-판서로 이어지는 결재 라인을 따라 처리했다. 이와 달리 고려시대는 우선 처리할 사람을 먼저 지정한다. 사안이 가벼우면 책임자를 별감으로 임명하고 사안이 크면 담당자를 중심으로 임시기구를 설치하는데 도감이라 불렀다. 화포를 만들어야 할 상황이 생기면 국왕은 그 분야에 정통한 인물을 도감 책임자인 판사로 임명하고 화통도감을 설치했다. 유명한 최무선이 화통도감 책임자였는데 그전에는 어떤 직책도 맡은 적이 없었다. 화약 제조술을 익힌 개인 능력을 바탕으로 신설조직의 책임자가 된 셈이다. 이건 오늘의 굳고 고집불통인 관료 조직 개혁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닐까?
조선과 청의 관계를 다룬 연구자는 당시 양측에서 합의한 관원 외에는 국경이동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에서는 국왕 명의의 외교 문서를 지닌 관원만이 국경을 넘어 북경에 갈 수 있었고, 공문 답서를 받으면 곧 북경을 떠나야 했다. 조선 관원이 의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이동로도 성경(심양)→광녕→산해관→-북경의 규정된 도로만 이용 가능했다. 조선 관원은 북경에서도 정해진 숙소에 머물러야 했다. 홍대용, 박지원이 연행록에서 청 문물을 배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고 역설했으나 이들은 조선의 공식 관원이 아닌 수행원에 불과했다. 조선 사신단의 정식 관원이자 조정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이른바 삼사신인 정사, 부사, 서장관은 청과 실제적 교류를 못한 것이다. 19세기를 전후한 건륭제 시대에 조선 삼사신과 청 관원의 교류가 시작되었으나 홍대용 등 사신 수행원들의 교류에 비하면 약 반세기 이상 늦은 시점이었다. 길 개방과 사람 교류는 문명개화에 필수다.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진 이유는 혹시 청과 관원 교류가 늦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고려의 외국인 정착과 조선과 고려의 나랏일 처리, 청나라와 교류 같은 과거의 광맥에서 금을 캐내 창조적으로 응용하는 건 우리 몫이다. 역사는 손댈 수 없는 화석이 아닐 것이며, 과거는 정말 지나가지 않고 색깔과 형태를 달리하며 변주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한국 사회가 부딪힌 문제와 연결해서 꼼꼼하게 들춰 읽어야 할 거리가 가득하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