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발에 들어가는 화학소재 생산
- 외환위기 때 경영 악화로 빚더미
- 친환경 용제 개발로 위기 돌파

- 채무 없고 탄탄한 기술력에
- 세계적 기업 잇따라 주문·투자
- 해외공장·제품설비 증설 계획

글로벌 온라인 결제 서비스 기업인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 피터 틸이 출자한 글로벌 사모투자사 ‘크레센도 에쿼티 파트너스’(이하 크레센도)가 지난 8월 경남 양산의 한 중소 화학 업체에 400여억 원을 투자했다. 2002년 15억 달러에 페이팔을 매각한 피터 틸은 그동안 전 세계 IT, 첨단기술 기업에 주로 투자해 왔다. 크레센도가 이전에 투자한 한국 기업 역시 제조 및 IT 회사였다. 그런데 피터 틸과 크레센도가 그동안 투자해왔던 곳과 다른 분야인 화학 업체에 투자한 속내는 무엇일까.

	경남 양산시 동아화학의 연구실에서 직원들이 소재 개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서순용 선임기자

17일 오전 경남 양산 산막동에서 ‘동아화학㈜’ 류기석(55) 대표를 만났다. 류 대표는 올해 초 처음 크레센도 관계자가 찾아왔을 때 얘기를 먼저 들려줬다. 그도 처음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서 의심부터 했단다. IT나 반도체 기업에 투자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화학 업체에 투자하겠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학연·지연·혈연 3無

	이 회사 류기석 대표.

크레센도는 IT, 의료 기기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 소재를 만드는 국내 화학 업체를 찾았다. 한국의 주력 제품인 휴대전화,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외국 화학 소재가 점차 국산화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본 것이다. 동아화학은 1990년부터 신발에 들어가는 화학 소재를 만드는 업체로 시작해 현재 삼성 휴대전화, 현대 자동차 등에 화학 소재를 납품하고 있다. 이밖에도 크레센도는 미국 실리콘밸리 등에서 화학 소재를 사용하는 IT, 의료기기 회사와의 파트너십도 생각했다.

크레센도는 투자에 앞서 철저한 사전 조사를 진행했다. 국내 회계 법인, 법무 법인 등을 통해 회사 전반적인 경영 상황을 파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보통 한국 중소기업에는 학연·지연·혈연 등을 통한 특수관계인 사이의 거래 내용이 발견되는데, 동아화학에서는 이 세 가지가 전무했다. 크레센도는 투명하고 깨끗한 기업 경영에 깜짝 놀랐다. 크레센도가 놀란 부분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동아화학의 채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 수십 년 간 글로벌 화학 기업의 아시아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동아화학을 높게 평가했다. 전 세계 화학업체 중 업계 1, 2위를 다투는 ‘다우케미컬’은 2013년부터 동아화학을 자신의 아시아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크레센도가 투자 전 다우케미컬에 문의했더니 “동아화학은 아시아 최고의 파트너”라는 답변을 들었다. 동아화학은 앞서 2004년부터 벨기에 화학업체인 ‘솔베이’ 제품의 아시아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이 글로벌 화학 기업과 파트너를 맺게 된 배경에는 이같은 동아화학만의 저력이 숨어있다.

■“우리가 해보겠습니다”

1990년 창립한 동아화학은 신발에 들어가는 화학 소재를 공급하는 중소기업으로 시작했다. 국내 신발 산업이 휘청거리자 동아화학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 1990년대 해마다 적자를 기록하자 류 대표가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당시 34살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동아화학을 이렇게 떠맡다시피 했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지자 경영은 더욱 악화했고 2002년 당시 자본금 15억이던 회사의 빚은 140억 원까지 늘었다.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동아화학에 한 줄기 희망에 날아들었다. 솔베이로부터 휘발성이 적은 친환경 용제를 생산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동아화학 외에도 국내 기업 2곳이 달려들었지만 모두 포기했다. 솔베이의 프랑스 공장은 본사의 일거리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화학 소재를 생산하는 핵심 기술을 내주지 않았다. 제품 생산에 들어가는 재료, 기계만 공개했다. 류 대표는 “당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생산해보기로 했다”고 회상했다.

부산·울산·경남 등 관련 기술자들을 불러 수십 차례 화학 소재 생산을 연구한 끝에 결국 솔베이가 원하는 화학 소재를 생산해냈다. 솔베이도 자신의 프랑스 공장보다 더 좋은 제품을 생산해내는 동아화학에 놀랐다. 솔베이는 2006년과 2009년 동아화학에 제품 생산 시설을 증설하기도 했다. 류 대표는 이런 경험을 살려 다우케미컬의 폴리우레탄 제품을 생산하는 아시아 전진기지 역할도 하게 됐다. 당시에도 국내외 기업 10곳이 몰렸지만 다우케미컬이 선택한 곳은 동아화학이었다.

두 외국 기업의 아시아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안정을 찾은 동아화학은 이제 고부가 가치 친환경 소재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류 대표는 “회사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 크레센도로부터 투자받은 자금을 해외 공장 증설과 친환경 신제품 개발 등에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